진짜 경기는 안하고…‘족보 싸움’ 난타전
▲ 지난 11일 KBC 기존 집행부가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홍수환 씨를 회장 사칭 등 혐의로 고소했다(위). 아래는 지난 7일 KBC 비상대책위원회 전국총회에서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홍수환 위원장. 연합뉴스 |
최근 ‘한 지붕 두 집행부’의 내분사태를 맞고 있는 한국권투위원회(KBC)의 양측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상대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KBC는 한때 미국에 이어 세계 2대 시장으로 국민스포츠로 최고인기를 끌었던 프로복싱을 관장하는 기구다. 잘나가던 시절 정치인들이 서로 수장을 맡으려 했고, 돈도 넘쳤다. 하지만 지금은 회장이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권한대행도 도망가기 바쁘다. 돈도 말라 체불임금, 월세미납금 등 약 5000만 원에 달하는 빚이 있을 뿐이다. ‘프로복싱을 살리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서로 당신들에게는 내줄 수 없다고 한다. 종로5가 사무국을 쓰고 있는 한국권투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와 인근 중곡동에 임시 사무실을 낸 기존 집행부(이하 집행부), 양쪽의 입장을 모두 담아 쟁점을 분석해봤다.
#망가질 대로 망가지다
2008년 1월 취임한 김철기 KBC 회장이 4년 임기의 반도 채우지 않고 2009년 10월 갑자기 사퇴했다. 이어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던 김주환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각종 송사에 시달린 끝에 잔여임기를 두 달여 남겨놓고 지난해 10월 물러났다. 이후 이흥재 수석부회장이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지만 역시 한 달도 되지 않아 사임했다. 잇달아 회장 공백 사태가 이어지자 KBC 이사를 맡고 있던 신정교 씨가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다(2011년 11월).
2년여 동안 회장 두 명, 그리고 직무대행 등 수장 3명이 ‘못해먹겠다’며 내뺀 것으로 KBC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수장들이 한국 프로복싱을 책임지는 명예를 스스로 던져버린 이유는 주로 돈 때문이다. 정상적인 KBC의 운영을 위해서는 회장이 사재를 털어서라도 후원금을 내놔야 하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끊이지 않는 법정싸움도 회장들을 힘들게 한 것으로 분석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홍수환, 유명우 등 전 세계챔피언 출신들이 중심이 돼 2011년 12월 22일 비대위를 만들고, 1월 7일 전국총회를 열어 새 KBC를 구성했다. 반면 신정교 회장직무대행을 중심으로 한 집행부는 12월 30일 사무실 무단침입 혐의로 서울 혜화경찰서에 비대위 측 인사를 고소했고, 이어 1월 12일에는 사칭(한국권투위원회 명의)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서 고소했다.
황현철 전 KBC 홍보부장은 “프로복싱은 개인종목이다 보니 예전부터 크고 작은 파벌이 많았다. 그런데 김주환 회장 시절 유명우 사무총장과의 분쟁<일요신문 919호 2009년 12월 27일자 참조>이 일면서 지금의 대립구도를 띠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선 복싱인들 지지는
▲ 유명우 |
이에 집행부의 대변인 격인 삼손체육관의 서성인 관장(전 IBF 주니어페더급 챔피언)은 “세가 크다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정당화되면 나중에 후배들도 똑같은 방법을 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수치로 130명이라고 하는데 실제 선수를 육성하고, 시합에 출전시키는 체육관은 30~40개 정도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 집행부를 지지한다. KBC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일선 관장들이 선배들이 부탁하니까 마지못해 들어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일부에서는 다수인 비대위 측을 ‘복싱인 그룹’, 기존 집행부를 ‘비복싱인 그룹’이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집행부에는 서성인 관장을 비롯, 김태식 전 세계챔피언 등 복싱인들도 다수 있다.
#법적 공방에 나라망신
법적 공방은 크게 회장선출의 적법성, 사무실 불법점거 여부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신정교 회장직무대행의 선출과정이 정당했느냐가 중요하다. 정당하다면 비대위의 행위가 정관에 위배된 그릇된 것이고, 반대의 경우는 비상시국에 사무정상화를 위한 비대위 설립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서성인 관장은 “회장 유고시에는 이사회에서 권한대행을 뽑도록 정관이 규정하고 있다. 갑작스런 공백사태로 인해 다소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규정과 절차를 따랐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홍수환 비대위 위원장(새 KBC 회장)은 “한국권투위원회가 신정교 회장 권한대행을 선출하기 위해서는 7일 전에 공고를 내야 하는데 이런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비대위 측은 이사회 구성 멤버의 선출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고, 집행부는 거짓이라고 일축한다.
둘째, 사무실 불법점거에 대해서도 양측의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5가의 한 빌딩에 임대로 있는 한국권투위원회 사무실은 12월 20일부터 충돌의 장이 됐다. 지금의 비대위 멤버가 된 인사들이 이날 권투위원회를 방문해 간담회를 가졌고, 집행부는 이원복 고문을 제외한 전원이 21일부터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있다. 비대위 측은 “누가 점거했다는 말인가?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고 있고, 자기들이 사무실을 버린 것”이라며 펄쩍 뛰고 있고, 집행부는 “사무실을 무단으로 점거당했다. 직원들이 정상적으로 출근하면 물리적 충돌이 생길 것을 우려해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경찰에 고소한 것이다.
이렇게 양측의 대립은 해외로도 번졌다. 먼저 비대위는 KBC의 해외통인 이원복 고문을 통해 세계 4대 프로복싱 단체(WBA, WBC, WBO, IFF) 중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WBA, WBC로부터 즉각적인 지지선언을 받았다. 특히 한국 회장이 당연직 부회장을 맡아오다 김주환 회장 때부터 자리를 잃은 WBC는 홍수환 비대위원장을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한국과 교류가 많은 일본 등 다수 국가의 복싱단체도 비대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서성인 관장은 “이것이 바로 명의를 사칭한 범죄다. 한국권투위원회라고 해외에 공문을 보내니 일시적으로 인정된 것일 뿐이다”고 밝혔다.
양측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당장에 대회를 열고, 경기를 치를 일선 복싱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택했다가는 나중에 혹시 최종승자가 바뀌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설 연휴면 프로복싱 빅 이벤트로 나라가 떠들썩했는데, 2012년 설은 가뜩이나 침체된 한국 프로복싱이 완전히 고사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