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민심’에 당했다
▲ 최근 치러진 2대 금융투자협회장 선거는 유력 후보가 예선전에서 탈락하는 등 이변의 연속이었다. 왼쪽부터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 황건호 현 회장, 박종수 당선자. |
차기 금투협회장 선거의 첫 이변은 황건호 현 회장의 연임 포기다. 당초 황 회장은 연임 도전에 강한 의지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 대표들의 ELW 스캘퍼에 대한 특혜 관련 소송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도 연임의 명분을 찾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이 많다. 어쨌든 황 회장이 재판 현장까지 방문한 이 소송 1심 판결은 증권사 대표들의 승소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ELW 문제도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린 지난 12월 초, 황 회장은 해외 출장 일정을 줄이고 황급히 귀국한 후 돌연 연임 포기를 발표한다.
금투협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상당한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11월 한 차례 압력이 있었지만, 황 회장이 연임도전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초 또다시 강한 압력이 작용해 해외 일정까지 줄여가며 귀국, 다급하게 연임포기를 밝혔다”면서 “이 같은 압력은 금투협 임원들에게도 작용해 임원들이 황 회장의 용퇴를 건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황 회장의 이번 임기에 맞춰 임기를 맞춰놓은 임원들이 황 회장에게 용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외압의 또 다른 증거”라고 말했다.
두 번째 이변은 후보추천위원회에서 유력 후보의 예상 외 낙마다. 당초 협회장에 도전장을 낸 6명의 후보 가운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정의동 전 한국증권예탁결제원 사장이었다. 정 전 사장은 재정경제부 출신으로 초대 코스닥위원장을 거치며 관료에서 민간 경영자로 변신에 성공한 경력을 갖고 있다. 성격도 원만해 정·관계는 물론 언론계에서도 상당한 우호 인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사장이 후보에 도전하면서 일각에서는 그가 50% 가까운 표를 확보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하지만 후추위에서 어이없이 떨어졌다. 겉으로 알려진 이유는 프레젠테이션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데다, 질의응답에서 대답이 우물쭈물했다는 정도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후보 대부분이 사장까지 지낼 정도의 경륜이 있는 분들인데, 프레젠테이션이나 짧은 질문을 갖고 후보로서의 적정성을 평가 받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후추위원 대부분이 교수 출신들인데, 이들이 현업에 대해 얼마나 잘 알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실제 6명의 후추위원은 서울대 서강대 등 교수 출신과 경제신문 간부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신문 간부 출신 후추위원은 당시 “뚜렷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6명 모두를 후보로 추천해 회원들에게 결정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은 현 정권의 실세인 류우익 통일부 장관(전 대통령실장)과 서울대 지리학과 동창이다. 현대증권 사장 재직 3년 외에는 증권업계 경력이 없는 데다, 현재 진행 중인 ELW 소송의 피고다. 최 사장이 후추위를 통과하고 유력한 정 전 사장이 떨어진 것은 ‘고위층’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경력에서도 최 사장은 세무직 공무원 생활이 거의 전부며, 경제관련 청장급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약한 조달청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류우익 장관이 최 사장을 위해 움직였다면 청와대 측근 아래 있는 국내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모두 ‘친 MB계’로 통한다. 여전히 신한지주의 실세인 라응찬 전 회장도 TK(대구·경북) 출신으로 류 장관, 최 사장 등과 교류가 있다는 후문이다. 비록 소문이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청와대가 움직여 금투협회장 선거에 개입한 셈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교수들이 굳이 3명의 후보를 잘라내려 했다는 게 의심스럽다. 특히 가장 유력한 후보를 미리 잘라내게 되면 다른 후보에게 엄청나게 유리해진다”면서 “특정 후보를 밀라는 외압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 셈”이라고 전했다.
세 번째 이변은 본선거다. 애초 후추위를 통과한 3명 가운데는 최경수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점쳐졌다. 같은 관 출신의 막강한 경쟁자였던 정의동 전 사장과, 유흥수 LIG증권 사장을 낙마시킨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할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힘도 ‘레임덕’ 앞에서는 결국 한계를 드러냈다. 1차 투표에서 43%를 얻은 박 후보에 10%포인트 차이로 뒤진데 이어, 2차 결선 투표에서도 59% 대 35%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정의동 후보가 탈락하고 최경수 후보가 후추위를 통과하면서 관의 낙점이 이뤄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외압은 전혀 없었다. 160개가 넘는 회원사를 일일이 접촉해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회사 대표는 “지금이 정권 초기면 모르겠지만, 정권 말기에 누가 정부 눈치를 많이 보겠느냐. 자칫 현 정부 관련 인사를 뽑았다 정권 교체라도 되면 후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각자가 자사의 이해관계에 맞춰 투표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현 정권 초기인 2009년 초 이뤄진 초대 금투협회장 선거에서는 정부의 묵인 아래 황건호 현 회장이 단독으로 출마, 투표 없이 추대 형식으로 회장 선출이 이뤄졌다. 결국 이번 투표는 ‘살아있는 권력’의 의지를 꺾은 이변인 셈이다. 다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후추위에서 가장 유력했던 정의동 후보가 떨어진 것이 결국엔 박종수 당선자를 탄생시키는 변수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박종수 신임회장은 오는 2월 6일 취임식을 갖고 3년간의 임기를 시작한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