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착한 남자 벗고 첫 스릴러 도전…“필모 톱3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을 듯”
“톱3요?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웃음). 사실 지금 막 오픈을 한 상황이라 결과는 시간이 흘러봐야 알 것 같지만요. 제 톱 1, 2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첫째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인 게 당연하고, 그건 배우 소지섭을 알려준 소중한 작품이기도 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영화는 영화다'예요. 그 작품은 제가 영화를 다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작품이거든요. 이번 '자백'이 그 뒤를 이어 3등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처음 연기를 시작한 1996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많은 작품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활약해 왔지만 소지섭에게 주어진 역할은 대부분이 선역이었다. 소지섭을 스타덤에 올려준 KBS2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와 공효진과 호흡을 맞췄던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2013)처럼 로맨스 남주인공의 인상으로만 그를 기억하는 대중들도 적지 않다. 그랬기에 선역인지 악역인지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화 '자백' 속 소지섭이 맡은 유민호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극 중 유민호는 밀실 살인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 유망한 IT사업가로, 무죄를 입증받기 위해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김윤진 분)와 함께 숨겨진 사건의 조각을 맞춰나가게 된다.
“스릴러 장르의 작품이 저한테 잘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제가 선택을 하기 어렵기도 했어요. 드라마에서 제가 계속 착한 주인공만 맡다 보니까 폭력을 행사하거나 악한 감정을 갖는다거나 하는 게 좀 힘들었거든요. 아마 저한테 착한 캐릭터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신 건지 그런 캐릭터 위주로 들어왔던 것 같아요(웃음). 마침 이전에 해왔던 연기들에 조금 지쳐있던 차에 새로운 것을 찾다가 우연인지 행운인지 '자백'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던 거죠. 처음엔 연기를 하는 제 모습도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했고 이 시나리오가 어떻게 영화로 그려질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더 담백하고 심플하면서, 어떻게 보면 클래식할 정도로 쿨하게 나온 것 같아서 좋았어요.”
'자백'은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원작 '인비저블 게스트'의 큰 틀은 유지하되 세부적인 부분은 한국 관객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바꿔나갔다. 반전에 반전을 이끄는 두 개의 큰 축, 소지섭의 유민호와 김윤진의 양신애가 보여주는 팽팽한 신경전도 그 가운데 하나다. 좁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 둘의 양보 없는 기싸움은 관객들에게도 그 답답함과 긴장감을 그대로 안겨주며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낸다. 소지섭은 그런 김윤진과의 촬영에 대해 “선배님께 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김윤진 선배님은 베테랑이시죠. 할리우드에서도 굉장한 화두이신데 그럼에도 정말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분이에요. 대본 리딩을 할 때였는데 1시간 40분~1시간 50분 분량을 전부 다 외워서 오셨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라서 '나도 더 열심히 똑바로 준비해야겠다, 안 그러면 팽팽함에서 질 수도 있겠는데' 싶었죠(웃음). 실제로 세트에서 촬영할 땐 캐릭터들 간의 텐션을 유지하려고 선배님과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았거든요. 그랬는데 선배님 말씀이, 조금 어려운 신을 끝내고 나서는 제가 수다스럽게 말이 많았대요. 전 안 그랬던 것 같은데(웃음).”
첫 스릴러 도전의 스타트를 끊으며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들까지 받아냈으니 앞으로 들어올 새로운 시나리오에도 기대가 모인다. 주연이든 아니든,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든 그렇지 않든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해선 초연해졌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작품만 좋다면 '노 개런티'로도 출연하겠다는 의욕도 하늘을 찔렀다. 그의 소속사인 51K(피프티원케이)가 영화배급사 찬란과 함께 다양성 영화의 수입과 배급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도 영화 팬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영화에 진심이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소지섭은 이런 작품은 안 할 것”이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고 그는 덧붙였다.
“저는 좋은 작품이라면 언제든지 출연할 의향이 있는데 시나리오가 잘 안 들어와요(웃음). 아마 다들 '소지섭은 주연이어야 출연할 것 같아'라고 생각하셔서 저한테 (다양성 영화 같은) 시나리오를 잘 안 주시나 봐요. 사실 전 돈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거든요. 이미 (다양성 영화 수입·배급으로) 마이너스가 나고 있는데 그건 또 나름의 의미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만일 좋은 작품의 시나리오만 들어온다면 저는 당연히 '노 개런티'로 출연할 의향이 있어요.”
좋은 작품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기쁘고, 또 그 작품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게 소지섭의 이야기다. 올해로 데뷔 27년 차를 맞은 그는 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지금에 와서 신인처럼 작품을 맞이하며 새로운 자신을 찾아낸다는 쾌감을 다시 한 번 만끽하고 있다고 했다.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거나, 하나를 기가 막히게 잘해서 그것만 계속 보고 싶은 배우가 되거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소지섭은 전자였다.
“데뷔 때랑 지금을 비교하면 정말 많이 달라졌죠. 처음엔 그냥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했거든요. 제가 가장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발리에서 생긴 일'을 기점으로 연기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연기가 너무 좋은데 한편으론 너무 힘들기도 해요. 연차가 쌓인다고 해서 연기가 더 쉬워지고 그러진 않아요.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하죠. 매번 연기를 해야 하지만 내가 잘하는 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는 배우가 되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보여드릴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