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당당해선 안 될 자들 향한 경쾌한 총성…이성민·남주혁의 세대 잊은 브로맨스도 주목
이성민, 남주혁 주연의 영화 ‘리멤버’는 아르메니아계 캐나다인 감독 아톰 에고이안의 2015년 작품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독일 나치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뒤 노년에 치매를 앓게 된 생존자의 복수를 그린 작품으로, 비슷한 아픔이 있는 우리나라의 리메이크판으로는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친일파로 인해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한필주(이성민 분)가 알츠하이머로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 그들을 향한 복수를 이루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중에서 이성민은 80대의 노인으로 분장한 상태에서 세 가지 얼굴을 보여준다. 패밀리 레스토랑 TGIF에서 10년 이상 근속하며 젊은이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리는 ‘핵인싸’ 할아버지 점원 프레드, 60년 간 꿈꿔 온 복수를 위해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냉철한 ‘복수자’로서의 한필주, 그리고 기억을 잠식해가는 알츠하이머 증세로 자신을 잃어가는 ‘망각자’로서의 한필주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복수를 행하고, 의도치 않게 그를 돕게 된 TGIF의 절친 알바생 인규(남주혁 분)를 보호하면서 아직 젊고 창창한 그의 앞날을 걱정하는 한편, 동시에 자신의 죽음까지 결연하게 직면하는 3인분을 기꺼이 해낸 이성민의 연기력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주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의 아버지, 어머니, 형, 누이를 잔인하게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이들을 찾아내 처단하는 방식도 눈여겨볼 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관동군이 사용하던 구식 권총과 수제 폭탄 등을 이용해 복수를 이루는 모습은 당시 독립군의 활동과도 겹쳐 보인다. 이처럼 복수의 방식은 과거에 연결돼 있지만 말쑥한 양복과 중절모까지 갖춰 쓴 현대적인 모습으로 새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는 대비도 인상적이다. '리멤버'를 연출한 이일형 감독은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점에서 열린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 점에 대해 "주인공이 80대 할아버지이고 모든 동작과 상황이 느리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결심한 복수의 감정은 빠르다고 생각했다. 빨간색 슈퍼카에 태운 복수의 감정을 관객이 빠르게 따라가며 느린 템포의 주인공의 심리를 다급하게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대사나 행동이 없을 때 이성민은 눈빛만으로 스위치를 내리고 올린다.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자신의 남은 생을 바친다는 말을 반복할 때마다 스크린 속 필주의 눈은 현장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을 카메라나 스크린 밖 관객들이 아닌 그 너머에 닿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현실이 아니라 저 멀리 과거 또는 미래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한필주가 상징하고 있는 ‘과거의 청산’과 ‘미래 세대에의 전달’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와 반대로 현재와 미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규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 가운데 하나를 은유한다. 3세대 이상 과거의 일이라는 이유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도리어 반지성주의에 빠져 역사에 냉소하는 것을 ‘쿨’하다고 여기는 젊은 세대들의 득세 속, 여전히 생존하는 역사의 피해자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를 대변하는 셈이다. 담백할 결말을 원할 관객들에게 과잉 감정을 안겨주는 후반부 인규와 필주의 대화 신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필주라는 과거를 향한 인규라는 미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이 감독은 '리멤버'가 가진 메시지에 대해 "단순히 친일의 문제, 현재 사회에 남아있는 문제를 넘어서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을 고민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며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맥락이라기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이야기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자연스럽게 접근하게 됐다. 과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한필주라는 캐릭터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영화 ‘리멤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80대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이성민 분)가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 평생을 준비한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간 한국인들의 가슴에 천불이 일게 했던 ‘친일’ 사건사고들의 총집합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가슴의 답답함이 경쾌한 총성과 함께 ‘싸악’ 내려가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다. 예상할 순 있어도 뻔하지 않은 반전도 관전 포인트. 128분, 15세 이상 관람가. 26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