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등 총수부터 CEO까지 총력 유치 활동…경제 위기 극복 바쁜데 “부조리극을 보는 듯” 반응
SK그룹이 엑스포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경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있다. 최태원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지원 민간위원장을 맡고 있다. 재계 대표로서 엑스포 유치를 독려하는 역할이다. 최 회장이 전면에 나서자 재계 후진들이 뒤를 받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해외 정상들과 만나 부산 엑스포 유치 지지를 촉구 중이다.
외부에 노출되는 재계의 엑스포 유치 노력은 ‘진심’ 같다. 과연 그럴까.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정부의 부산 엑스포 유치전 압박에 “미칠 지경”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한 기업 관계자는 “정부에서 ‘도와달라’는 말을 전했으니 최종 선정까지 눈치껏 끊임없이 홍보해야 한다”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권 중점 사업 된 부산 엑스포…정권 핵심 입김?
엑스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행사다. 1993년 대전 엑스포, 2012년 여수 엑스포가 국내에서도 열렸다. 그러나 이번에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2030 부산 엑스포는 과거 두 행사보다 급이 높다. 엑스포는 등록박람회와 인정박람회로 나뉜다. 지금까지 인정박람회는 총 31회 개최됐지만 등록박람회는 12회 개최되는 데 그쳤다. 1993년 대전 엑스포, 2012년 여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였다. 이번에 유치를 추진하는 부산 엑스포는 ‘세계박람회’라고 불리는 등록박람회다. 등록박람회는 5년에 한 번 열린다. 인정박람회보다 규모가 크고, 개최 기간도 6개월로 길다.
부산이 엑스포 유치에 처음 나선 것은 2014년. 그러나 엑스포 유치가 국가적 아젠다로 승격된 것은 올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다. 최태원 회장이 유치추진위 공동위원장을 맡게 된 것 또한 윤석열 대통령 요청에 따른 것이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 4월 부산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주관 전국상의 회장회의에 참석해 최 회장을 만나 유치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당선 이후 재계 인사들과 사실상 첫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부산 엑스포 유치를 요구한 것”이라며 “날아오르는 권력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셈”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권은 왜 이토록 부산 엑스포에 집착할까. 임기 내 이렇다할 국제적 이벤트 개최가 없는 윤 정권이 대통령 ‘치적 만들기’ 용도로 부산 엑스포를 낙점했다는 분석이 따른다. 세계박람회는 올림픽·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행사로 불린다. 그간 3대 행사를 모두 연 국가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6개 국에 불과하다.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에 이어 세계 3대 행사를 모두 개최한 7번째 국가가 되는 셈이다.
이른바 ‘윤핵관’으로 꼽히는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의 입김이 거세다는 뒷말도 나온다. 장 의원 지역구가 부산 사상구인 탓이다. 실제 장 의원은 윤 대통령 당선 직후 부산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산월드엑스포를 대통령 어젠다로 추진해야 한다”며 “정권 모든 역량을 동원해 유치하겠다는 것이 윤 대통령(당시 당선인)의 강력한 의지”라고 밝히기도 했다.
#경제 위기 와중 ‘엑스포 출장’에 끌려다니는 재계
대통령이 직접 나서자 재계는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촌극’을 벌이고 있다. 부산 엑스포 유치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지난 15일 열린 방탄소년단(BTS) 콘서트 비용 70억 원은 기업들의 ‘자발적 협찬’으로 구성됐다. 최근 주요 기업 오너 행보를 전하는 보도자료는 부산 엑스포 일색이다.
최태원 회장은 유치위원장을 맡은 후 매달 해외 출장길에 올라 각국 정상을 만나고 있다. 사업 관련이 아닌 부산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지지 촉구를 위한 출장이다. 최근 최 회장은 11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내년 11월 최종 선정까지 매달 해외 출장에 나서는 것은 물론, 파리에 상주할 방안까지 검토한다는 말이 들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추석 연휴에 멕시코와 파나마를 방문해 양국 정상을 만나 부산 엑스포 유치 지지를 당부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9월 1일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2009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사면·복권됐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회장 취임을 앞두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만큼 정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대기업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를 찾아 지지를 요청했다.
오너가 이럴진대 월급쟁이 최고경영자(CEO)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세계박람회를 주최하는 BIE 회원국은 170개. 대한상의는 개최지가 최종 선정되는 내년 11월까지 100개 국 이상을 직접 방문해 유치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현재 각 사 고위 경영진을 비롯한 유치위원회 관계자가 방문한 국가는 60여 개로 알려져 있다.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50개 국가 남짓을 더 방문해야 한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에서 비즈니스가 우선시돼야 하는데 최고 결정권자들이 엑스포 홍보를 위해 의미 없는 출장에 끌려다녀야 하는 상황이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문제는 막상 부산 엑스포 유치가 득이 되긴 어려워 보인다는 데에 있다. 세계박람회의 위용은 하락세다. 올림픽·월드컵과는 그 ‘급’이 다르고 행사 유치로 기업이 득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부산의 경쟁상대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다. 글로벌 각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부산 엑스포 유치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 또한 부담이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냉전이 한창이던 20세기 중후반까지는 각국 기술력을 뽐낸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며 “기술 전시회로 치자면 매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되는 CES 등이 더욱 의미 있다”고 지적했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