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8월8일 방북길에 나선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왼쪽)과 정몽헌 회장. | ||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지난 2000년 9월 현대증권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익치씨.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지난해 3월 정주영 회장의 사망으로 잠시 한국에 들렀던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해외에 체류해 왔다. 그런 그가 지난 27일 갑자기 일본으로 건너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리고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지난 98년 2천1백34억원이 투입된 사상 최대규모의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정몽준 의원이 관여됐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 이씨는 현대그룹을 사실상 이끌어 온 ‘5인 위원회’의 핵심 멤버였다. 묵묵히 지내왔던 그가 고 정주영 회장의 6남인 ‘국민통합21’ 정몽준 의원에게 예기치 않은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30년 동안 타왔던 ‘현대호’의 선주 아들을 직접 공격하고 나선 셈이다.
이씨의 발언이 터져 나오자마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그렇지 않아도 ‘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는 반응이다. 이른바 ‘한-민 협공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 대선전략상 정 의원을 가라앉혀야 하는 이회창-노무현 후보의 목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특히 2위 탈환을 노리고 있는 노 후보의 경우 이번 이씨의 발언은 고맙기 짝이 없다.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은 “부도덕한 부실재벌 계승자가 어떻게 국가지도자가 되겠다는 말인가”라며 후보 사퇴를 요구했다. 천정배 민주당 선대위 정무특보도 “주가조작에 대한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면서 “검찰은 사실 여부를 규명해야하며 사실이면 정 의원은 범죄행위를 한 것”이라면서 마찬가지로 후보 사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정치권에서는 이씨의 ‘도쿄발언’이 향후 대선가도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동인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씨가 대선 전에 귀국해 검증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할 뜻을 밝히고 있어 파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정 의원측의 대응도 만만찮다. 정 의원은 지난 28일 검찰수사, 청문회를 포함한 국정조사, 특검제 등 모든 수단을 동원, 진상을 밝힐 것을 제안하는 등 정면대응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또한 이씨에 대한 형사고발 등 법적대응을 검토하고 있다.
이씨의 도쿄발언의 내용이 정 의원이 반발하는 것처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정 의원이 큰 타격을 입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고, 정 의원과 후보단일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노무현 후보도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엄청난 파장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대선을 50일 앞둔 미묘한 시점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하고 나섰을까. 이씨가 염두에 둔 노림수는 과연 무엇일까. 일단 이씨의 발언은 내용으로 보나 시점으로 보나 특별한 노림수가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이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씨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정 의원에 대한 정치적 검증을 요구했다. 말이 ‘검증’이지 사실은 정 의원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나라당쪽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 때문에 정 의원측은 이씨의 폭탄발언에는 대세를 굳히려는 한나라당의 의도가 숨어있다면서 ‘정치적 배후설’을 제기하고 나섰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며 한나라당 개입설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강신옥 창당기획단장도 “이 전 회장의 발언은 3년 전 한나라당 이회창 당시 총재가 했던 말과 같은 내용”이라고 거들었다. 박진원 대선기획단장은 “주가조작 당시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8%, 현대계열사가 14%의 지분을 갖고 있어 정 의원은 이름만 현대중공업 회장이지 실권이 없었다”면서 “이 전 회장의 발언은 다분히 공작적인 것”이라며 한나라당을 의심했다. 이회창 후보의 동생 회성씨와 이씨가 경기고 동창이라는 사실도 부각시켰다.
▲ 10월28일 정몽준 의원이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발언과 관련해 해명 기자회견을 가졌다. 임준선 기자 | ||
이씨 발언은 이익치-정몽준 간 개인적 감정에서 비롯된 ‘정몽준 때리기’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씨는 기자회견에서 “정 후보가 모든 것을 나에게 넘기려하는 데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면서 “당시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자신이 검찰에 불려가던 날 아침 정주영 회장이 ‘몽준이에게 별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면서 결국 고인의 뜻에 따라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썼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는 정 의원의 신뢰도뿐만 아니라 신상에 관한 문제도 거론했다. 그는 “정 후보는 성격에도 문제가 있다”면서 “자신의 비서관을 때리기도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부하직원을 폭행하곤 했다는 사실은 선거운동이 본격화될 경우 도덕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는 대목이다.
이씨와 정 의원 사이가 틀어진 것은 200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그룹 내에서는 경영권 다툼으로 벌어진 이른바 ‘왕자의 난’이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 이때 이씨가 정몽헌 당시 현대 회장을 지지하면서부터 정 의원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 의원은 왕자의 난에 대해 “가신그룹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다가 2000년 8월 정 의원이 대주주로 있던 현대중공업이 ‘이씨의 보증각서를 담보로 97년 현대전자의 외자유치에 대한 지급에 나섰다가 2천4백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며 제소하면서 둘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올 초 법원은 이씨와 현대증권 등이 현대중공업에 1천7백18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현대 일부 형제계열사들이 차기정권에서 별탈이 없도록 하기 위한 ‘보험용’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이씨에 대한 현대 계열사측의 배후설이다. 일부 형제가 정 의원의 대선출마에 반대했다는 얘기는 이미 알려진 사실. 실제로 이들 형제들은 기업경영방식과 정치적 문제에 있어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치적 계산에 따라 정 의원보다 회사를 살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추론이다.
사실 정 의원이 대권행보를 시작하면서 현대가는 지난 92년과 비슷한 ‘정치적 태풍’의 영향권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다. 현대상선은 최근 한나라당에 의해 제기된 대북비밀지원설로 한때 부도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사실 대북지원설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정몽헌 회장은 현대상선 회장으로 복귀를 했을 것이라는 게 재계 일각의 관측이다. 하지만 그는 대북지원설 이후 한 달이 넘도록 미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현대상선에 대한 계좌추적은 현대로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대측 관계자들은 만일 계좌추적이 이뤄질 경우 회사 비자금문제 등 예상치 못한 문제가 불거져 나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도 “계좌추적을 해야한다”면서도 “현대의 어두운 면이 드러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이씨의 폭탄선언은 현대와 정 의원의 관계를 절연함으로써 향후 정치적 파장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씨는 “(해외 체류 생활이) 정리되는 대로 한국에 들어올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선 전에 귀국해 검증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물론 주가조작 사건에 정 의원이 직접적으로 연루됐다는 증거는 없다고 그는 밝혔다. 다만 정황이 그렇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씨는 92년 현대중공업 비자금 사건에도 정 의원의 연관성을 시사하고 있어 향후 정 의원의 대선가도에 그가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다목적용으로 제기된 이씨의 발언이 대선국면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볼 일이다. 정몽준-이익치의 전쟁은 이제 막 1라운드를 시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