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로 뒤덮인 TV 돌연 ‘비보’가 꽂혔다
▲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로 전국이 들썩이던 바로 그때 KAL858기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사진은 대한항공 보잉777 기종으로 사건이 발생했던 보잉707과는 다르다. |
나는 당시에 대통령선거에 관심이 많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대통령 후보들의 모습이 비치면 저절로 시선이 갔다. 87년의 대통령후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이었다. 노태우는 여당이 후보였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치열하게 반독재 투쟁을 해왔고 김종필은 공화당과 유신체제의 일원이었다. 게다가 김종필은 안전기획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공화당이 몰락하여 그의 지지도는 충청도 일대에 한정되어 있었다.
1987년 11월은 선거의 계절이었다. 각 후보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유세를 하고 있었다. 언론은 온통 대통령 후보들의 동정을 보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뉴스의 절반이 대통령선거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에 투입되어 토요일도 쉬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근무한 나는 모처럼의 휴일이라 침대에서 뒹굴며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창아야, 밥먹고 자.”
일요일에 늦잠이라도 실컷 자려고 하면 항상 어머니가 깨우고는 했다. 그날도 어머니가 몇 번이나 재촉하는 바람에 오전 11시가 되어서 일어난 나는 추리닝 차림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면서 휴일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일요일이지만 친구들과의 약속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내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었으나 사귀는 남자도 없었다. 휴일에는 교회를 가고는 했는데 그날 따라 집에 있고 싶었다.
사람들은 안전기획부를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정보부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일선에서 일을 하는 정보 요원들이나 수사 요원들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안기부의 요원들 대부분이 일선에서 묵묵히 일을 했다.
정보부를 정치 공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이제는 소셜네트워크가 발달하여 정치 공작이 쉽지 않을 뿐더러 국민 의식 수준이 높아져 이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후 3시가 넘었을 때였다. 갑자기 TV 화면에 ‘KAL858기 태국 상공에서 실종’이라는 속보가 자막으로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나는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여객기의 실종은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 테러리스트가 비행기를 납치하거나 폭파하는 사건은 드물게 있었어도 실종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항공기 납치 사건은 1976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프랑스 국적기를 납치한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1976년 6월 27일 이스라엘을 출발해 그리스 아테네에서 중간 기착한 뒤 프랑스로 향하던 프랑스 여객기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6월 27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공중에서 납치되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강제착륙되었다. 747 점보 제트기는 ‘하늘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항공기로 승객을 500명 이상을 태울 수 있었다. 엔테베 공항에 강제 착륙한 여객기에도 자그마치 400명에 이르는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은 은밀하게 테러리스트를 후원하고 있었고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인 승객을 제외한 258명의 승객을 석방한 뒤에 이스라엘, 케냐, 서독 등에 수감되어 있는 53명의 동료 테러리스트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7월 3일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100~200명의 특공대를 태운 4대의 허큘레스 C-130H 화물수송기를 파견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우간다까지 4000㎞를 날아 7월 4일 엔테베 공항에 착륙한 지 1시간 만에 7명의 테러리스트를 사살하고 소련이 우간다에 제공한 11대의 미그 전투기를 파괴했다. 그들은 우간다 군인 30명 이상을 사살하고 105명의 인질을 구출했다. 희생자는 이스라엘 특공대원 1명과 인질 3명뿐이었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비행기들은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병원 비행기를 만나 인질들을 치료하고,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연료를 공급받았다. 엔테베 구출작전의 성공은 전세계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이때 테러리스트에게 호의적이던 이디 아민 대통령으로 위장하여 벤츠를 타고 공항으로 들어가 테러리스트를 속일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보기관은 미국의 CIA와 소련의 KGB, 이스라엘의 모사드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의 첩보기관도 세계적이다. 우리는 안기부 수사요원 교육을 받으면서 그들의 전설적인 첩보 활동에 대해서 배우고는 했다.
‘납치되었나, 추락했나?’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KAL기는 미얀마와 태국 국경 지역의 밀림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고 KAL기에는 승무원 20명과 승객 95명이 탑승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KAL기는 바그다드에서 이륙하여 아부다비를 경유하여 29일 오후 8시 40분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사실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KAL기는 미얀마의 랑군 상공에서 29일 오후 2시 44분 마지막 교신을 한 뒤에 실종된 것이다.
▲ 김현희. 일본 이름은 마유미. KAL기 폭파 사건은 발생한 지 25년이나 흘렀지만 각종 음모론이 아직까지 제기되고 있다. 사진제공=우먼센스 |
대통령선거와 KAL기 실종사건으로 하루종일 어수선했다. KAL기는 점점 추락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정부와 언론사들은 이때까지도 KAL기가 정비 불량 또는 조종사의 실수인지 정확한 판단조차 못하고 있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민관합동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상황을 파악하느라고 분주했다.
‘미그기가 격추한 것은 아니겠지.’
나는 소련의 미그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사건을 떠올리면서 몸을 떨었다.
비행기 추락사건은 불과 4년 전인 1983년 9월 1일 뉴욕을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경유,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 점보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한 사건이다. KAL기에 탑승한 승객은 한국인 81명, 미국인 55명, 일본인 28명, 중국인 36명, 필리핀인 16명, 캐나다인 10명, 타이인 6명, 오스트레일리아인 4명, 스웨덴인 말레이시아인 인도인이 각 1명, 베트남 난민 1명과 승무원 29명이었다. 탑승자들이 자그마치 300명에 이른다.
이는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하여 민간 항공기를 격추한 사건으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그러나 태국 상공이나 랑군 상공에서 추락했다면 소련이나 북한 같은 적성 국가에 의해 미사일로 추락시킨 사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비상소집을 하지 않네.’
국가적으로 비상사태가 발생되면 안기부는 요원들을 비상소집한다. 나는 모처럼 휴일에 비상소집이 될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저녁 때까지도 비상소집은 없었다. 안기부는 비상소집을 자주 했고 입사 초기에 나는 회사생활을 긴장 속에서 보냈다. 한번은 퇴근하고 집에 있는데 밤 10시가 다 되어 회사 상사인 듯한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와’하고 전화를 했다. 나는 ‘비상이구나’하고 택시를 타고 안기부로 달려갔다. 그러나 사무실이 조용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이 잘못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나는 급한 마음에 전화 건 사람을 확인하지도 않고 달려갔던 내 자신을 탓하면서 허망하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발신번호 확인이 불가능해 이런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문득 안기부의 부훈(部訓)이 떠올랐다. 안기부 요원들은 정보를 담당하고 스파이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공을 세워도 안기부 요원들이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이 없다. 오로지 음지에서 일을 하고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야 한다. 비상소집이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녁 때가 되자 대책본부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고 승객들 대부분이 중동 지역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귀국하는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충격적인 일이 알려지면서 통곡하는 가족들, 실신하는 가족들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에 방송되었다. 비행기는 추락인지 폭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대한항공과 외교부가 태국과 미얀마에 긴급 요청을 하여 KAL기 수색작업에 나섰다. 이라크와 바레인에도 협조 요청을 했다.
KAL기와 마지막 교신을 한 것은 랑군 항공통제소였다. KAL기는 급유를 위해 방콕 공항에 착륙하겠다고 교신을 한 뒤 두절되었다. 태국은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지대인 칸차나부리 밀림 지역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통보해 왔다.
승객들의 명단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승객들은 현대건설 근로자 56명, 정우개발 근로자 15명, 대우건설 근로자 4명, 이라크 총영사 및 외국인 2명 등 승객이 95명이었고 기장을 비롯하여 승무원이 20명이었다. 승객들이 대부분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돈을 벌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근로자들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