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도 없어…공중폭발이 확실했다
▲ 1987년 11월 30일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된 KAL기 추락 1면 기사. |
나는 일본 적군파를 의심했다. 그들은 아랍적군, 적군파 아랍위원회, 혁명적군 등으로 불렸으나 1974년 일본적군으로 정식 통일되었다. 언론에서는 일본 적군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공항 습격사건(1972. 5), JAL 소속 여객기의 공중납치 사건(1973. 7), 쿠웨이트 일본대사관 점거사건(1974. 2), 헤이그 프랑스대사관 습격사건(1974. 9)을 저지르는 등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
최근에 나가타 요코라는 악명 높은 여자 적군파가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일본 적군파의 지도자로 총과 폭력으로 물든 혁명 사상으로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71년 12월과 72년 2월 사이에 일본 군마현의 진명산과 가엽산 산악 아지트에서 그녀는 12명의 동지들을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산속의 아지트에서 동료들에게 혹독하게 자기비판을 강요하고 공산주의 학습에 태만하면 마구 구타했다. 극한의 산중에서 그들을 방치하여 사망하면 구덩이를 파고 암매장했다. 그들 중에는 형제도 있었는데 동생은 형을 울면서 때렸다. 임신 8개월에 폭행을 당해 사망한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적군파의 기관지 <적군(赤軍)>을 발행하고 <레닌 전집>, <김일성 전기>를 학습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만행이 알려져 경찰이 출동했다. 적군파는 중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자위대의 탱크까지 동원해야 했다.
나가타 요코는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가 체포되어 13명 살인, 1명 상해 치사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40년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65세가 되던 지난 2011년 2월 6일 사망했다. 적군파는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서독 적군파는 1977년에 서독항공기를 납치한 전력이 있었다. 적군파의 활약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 요원들은 그들의 행각에 촉각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북한도 강릉에서 이륙한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1987년 11월 29일의 KAL기 추락사건은 밤이 되어도 뚜렷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내가 남산의 안기부에 출근하자 사무실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직원들은 KAL기 사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언론 보도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승객 95명과 승무원 20명 등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소속 KAL 858편 보잉 707여객기가 29일 오후 2시경 미얀마와 태국 국경지대 상공에서 실종, 관계 당국과 외신은 사고기가 방콕 동쪽 80마일 지점의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타피코말리 태국 경찰 간부는 ‘KAL기가 추락했다고 우리 상관들이 내게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지점은 모르며 추락지점이 태국령인지 미얀마령인지 확실치 않다’고 말하고 수색팀이 짜여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1987년 11월 30일 <동아일보>가 1면에 대서특필한 내용의 일부다. <동아일보>는 사회면에 사고 소식을 모르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근로자 가족들이 통곡하고 실신하는 모습을 보도하여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오후가 되자 안기부는 테러에 의한 공중폭발로 묵시적인 결론을 내리고 이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랍에미리트 대사관과 대한항공 지사에 연락하여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15명의 외국인 탑승자 명단을 확보했다. 그중 하치야 마유미와 신이치 등 일본인 승객 2명이 바그다드의 사담공항에서 사고비행기인 대한항공 KAL858편에 탑승한 후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렸다는 보고를 받자 그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유미라는 여성이 위조여권을 갖고 다닌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부터 이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안기부는 본격적인 수사체제로 들어갔다. 특히 이들을 의심하게 된 이유는 통상 일본 여행객들이 입국신고서에 성만을 기재하는 것과는 달리 ‘신이치’ ‘마유미’라고 이름만을 기재하였고 비엔나, 베오그라드 등 북한이 해외공작거점으로 자주 이용하고 있는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이들 여행의 목적지인 바레인은 베오그라드에서 암만을 경유, 바레인으로 직행하는 것이 편리한데도 이들이 3시간 또는 6시간씩 공항 내에서 통과여객으로 대기하면서까지 바그다드와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대한항공 858기를 이용했다는 사실이었다.
대공수사국장은 해외요원들에게 긴급 연락을 하여 신이치와 마유미에 대하여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사단 자체에서도 그들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공수사국 회의가 열리고 우리 ○○과의 한영수(가명) 과장이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KAL기는 공중 폭발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마유미의 여권이 위조여권이라고 하니 그에 대한 조사를 하라.”
한영수 과장이 요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사고가 태국이나 미얀마에서 일어났고 용의자들이 비행기에 탑승한 곳이 중동지역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조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내가 소속된 과는 안기부 수사국 중에서도 북한의 공작원이나 일본, 특히 조총련과 관련된 대공 사건을 담당하던 과였다. 신문기사 등 관계 자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이 사고가 과연 두 일본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일본 내의 요주의 인물이나 유사 인물, 일본과 관계된 비슷한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하치야 마유미와 신이치는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린 뒤 걸프에어003편으로 바레인으로 떠났으며 바레인 시내 리젠시 호텔에 투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부터 비상이야. 집에 들어갈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조사해.”
▲ 바레인 리젠시 호텔 앞에서 찍은 김현희 사진. 신이치와 마유미는 목적지가 바레인이면서도 빨리 도착하는 직항편 대신 바그다드와 아부다비를 거치는 회항편을 선택해 의구심을 자아냈다. 마유미가 지닌 위조여권 역시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사진출처=MBC PD수첩 |
“무얼 드시겠습니까?”
그들은 승무원의 한국말 질문에 무반응이어서 일본어로 다시 묻자 말을 전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으로 의사표시를 대신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볼 수 없었다. 대개의 일본인들은 음료수나 식사를 제공할 때 의례 감사표시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않아 ‘일본인 같지 않은 일본인’이란 생각을 했다고 진술했다. 또 승무원들이 탑승자카드 제출을 요청했으나 아부다비에서 내릴 때까지 신분노출이 두려운 탓인지 카드작성을 거부한 채 내리는 등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고 밝혔다.
“지금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
수사국장이 한영수 과장을 불러 물었다.
“바레인 시내 리젠시 호텔에 투숙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영수 과장이 대답했다.
“그럼 바레인 대사관에 연락해 이들을 면담하게 해.”
“바레인에 직접 연락할 수 없고 아랍에미리트를 통해 하겠습니다. 아랍에미리트 대사관에 요원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예.”
한영수 과장이 대답했다. 우리는 즉시 아랍에미리트 한국대사관으로 연락을 하고, 아랍에미리트 대사관에서 바레인 대리대사 김정기에게 마유미와 신이치를 만나라고 지시했다.
“호텔에 마유미와 신이치라는 일본인들이 묵고 있습니까?”
김정기 대리대사는 먼저 리젠시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호텔은 처음에 확인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김정기 대리대사는 자신이 한국 대사이며, 여객기 추락사건과 관련하여 질문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호텔에서 마지못해 투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화를 연결해 주십시오.”
김정기 대리대사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