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장애 6급’ 연마직 노동자 회사 상대 손배소…2심 법원 “업무와 무관” 청구액의 1% 지급 판결
2016년 1월. 일을 마친 뒤 동료들과 식사를 하러 간 후윈량은 장갑을 벗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양 손 검지가 하얗게 변해 핏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동상에 걸렸을까 뜨거운 물을 손가락에 부어봤지만 잠에 들 때까지도 차도가 없었다.
다음 날 손가락은 다시 회복됐다. 하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어김없이 손가락은 하얗게 변했다. 때로는 참기 어려운 통증과 저림이 동반했다. 날이 따뜻해지자 이런 증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2016년 12월 겨울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후윈량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고, ‘레이노증후군’ 판명을 받았다.
레이노증후군은 기저질환, 또는 외부 환경 등의 원인으로 인해 손가락 또는 발가락 혈관이 오그라들었다가 이완하는 증상을 뜻한다. 이때 피부색이 백색, 청색 등으로 변하기도 한다. 대부분 통증과 저림 등이 함께 나타난다.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선 ‘백지병’이라고도 불렸다.
후윈량은 자신의 업무가 레이노증후군에 영향을 미쳤다고 의심했다. 후윈량은 2009년 8월 골프용품 생산업체인 ‘광성’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후윈량은 골프채 헤드 연마 작업을 맡았다. 헤드를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 고속으로 회전하는 기계에서 미세한 부분까지 연마하는 일이었다.
후윈량은 “연마기를 꽉 잡고 있지 않으면 헤드가 움직이기 때문에 불량품이 나오기 쉽다. 그래서 온몸의 사력을 다해 연마기를 고정시켜서 작업을 한다. 이때 기계가 작동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함께 떨린다”고 했다. 후윈량은 퇴근을 하고 집에 가면 두 손이 마비되다시피 해서 젓가락조차 들 힘이 없었다고도 했다. 이런 업무를 오래 하면서 레이노증후군에 걸렸다는 게 후윈량의 주장이었다.
후윈량은 자신과 비슷한 질병을 앓았던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후윈량은 독학으로 직업병 관련 지식을 습득했다. 그러던 중 2013년 12월 국가보건가족계획위원회가 발표한 ‘직업병 분류 및 목록’에 레이노증후군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윈량은 광둥성 건강관리부에 직업병 검사를 신청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선 회사로부터 여러 자료를 받아서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어야만 증명 자료들을 발급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후윈량은 낙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찬물에 손을 씻을 때 손가락이 하얗게 변하자 재빨리 휴대전화로 이를 촬영해 증거를 남겼다. 후윈량은 회사로부터 간신히 받은 자료, 병원 진단서 등을 중산시 노동능력평가위원회에 제출했다. 그 결과 2018년 11월 노동 장애 등급 6급을 인정받았다. 이에 따르는 산재 보상금 59만 위안(1억 1000만 원)도 받았다. 노동 장애 등급은 모두 10단계로 구성된다. 1등급이 가장 무겁고, 등급이 높아질수록 가볍다.
후윈량은 멈추지 않았다.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에 나서기로 했다. 후윈량은 “회사가 업무에 대해 사전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업무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면서 회사에도 책임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후윈량은 “부모를 봉양해야 하고,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노동력을 잃었다. 산재 보상금으론 남은 인생을 살기 힘들다. 레이노증후군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하소연했다.
고무적인 부분은 후윈량의 소송 제기 소식에 그동안 회사 눈치만 봤던 노동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후윈량 등에 따르면 2016년부터 144명의 광성 노동자가 레이노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이들은 후윈량과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고, 대부분 공장에서 진동에 시달려야 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들도 후윈량처럼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2021년 1월 후윈량은 광성의 건강권 침해, 장애보상금 등 6개 항목에 대해 93만 8000위안(1억 7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청구했다. 1심은 회사가 후윈량에게 47만 위안(87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후윈량이 청구한 금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다.
2심 법원은 광성이 후윈량에게 1만 1000위안가량(200만 원)만 지급하면 된다고 결론 내렸다. 법원은 “후윈량의 장애가 업무로 인한 것이란 명백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회사 측은 장애보상금, 피부양자 생활비 등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후윈량은 즉각 항소했지만 2021년 12월 27일 2심 결과는 유지됐다.
후윈량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후윈량은 최종심을 준비하고 있다. 후윈량에게 힘을 얻은 많은 노동자들도 소를 제기했다. 현재 100명에 가까운 레이노증후군 노동자들이 광성과 법정에서 다투고 있다.
광성에서 일하다 레이노증후군에 걸려 그만뒀다는 왕리홍은 대리운전 일을 하면서 소송을 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더워도 병 때문에 에어컨을 켜지 못한다. 이 고통은 아무도 모른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생활이 힘들다”면서 “그런데도 후윈량뿐 아니라 대부분 2심에서 형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소송이 길어지면 노동자들은 버티기 어렵다”고 했다.
이런 소식들이 알려지자 법원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봇물을 이룬다. 회사 측 주장만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실제 광성은 2심 재판을 앞두고 “1심 선고대로 돈을 지급하면 회사가 문을 닫는다”고 호소했다.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해 사전 교육, 시설 개선 등을 했다고도 강조했다. 연마직 노동자들의 경우 순환 근무를 하도록 했다.
광성의 한 노동자는 “광성이 뒤늦게나마 노동자를 위한 보호 조치를 한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하지만 후윈량과 수많은 노동자들에겐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들은 고통을 참으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이 와중에 재판까지 해야 한다. 2심 재판부가 산재 규정을 너무 엄격하게 본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중국=배경화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