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사에 휘둘릴라’…자가 운전 시동
▲ 정몽구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지난 2010년 11월 23일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 제2고로 화입식 현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제2고로에 첫 불씨를 심었다. 당시 정 회장은 선대부터 숙원사업이었던 것을 이뤄냈다며 한껏 고무돼 있었다. 그런데 정 회장의 표정에는 또 다른 성취감도 내포돼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철강업체에 조금이라도 끌려 다닐 필요 없이 큰소리 칠 수 있게 됐다는 것.
자동차를 생산하는 데 강판을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 회장의 표정에는 완성차업체로서 자동차용 강판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철강업체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중도 담겨 있었다. 강판을 사와서 자동차를 만든다면 강판 업체와 가격 협상에서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싫었던 정 회장이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고로를 일사천리로 완공하게 했다는 얘기다. 이는 현대제철과 현대차가 모두 인정하는 바다.
현대오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자동차가 갈수록 첨단화되고 IT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글로벌 전장 부품업체들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현대차 관계자는 “현재 자동차 원가 중 전장 부품 비중이 20~30%에 달한다”고 말할 정도다. 이 비중이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라는 데 업계 관계자들은 동의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는 자칫 글로벌 자동차 전장 부품업체에 ‘갑’의 위치를 온전히 지켜내지 못할지 모른다. 맘에 안 들거나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하시라도 인사를 단행할 정도로 불 같은 정 회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이다.
완성차업체로서 전장부문을 마냥 협력업체에만 의존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소비자들이 계속 자동차의 첨단장비와 편의성을 요구하고 있다”며 “엔진 성능과 함께 전장 역시 자동차 가격을 결정짓는 한 요소”라고 말한다. 즉 철판의 양이 자동차 가격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 첨단장비를 얼마나 적용했느냐가 자동차 가격을 결정짓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자동차 품질, 업체의 수익성과 직결된다.
지난 19일 현대차가 발표한 신형 싼타페에 적용한 ‘블루링크’ 시스템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스마트폰으로 원격 시동이 가능하고 문 개폐와 주차 확인도 가능한 이 시스템은 전자제어장치의 비근한 예다. 자동주행, 자동주차 등 전장의 적용 범위는 앞으로 무궁무진하다. 또 차량용 반도체는 전장뿐 아니라 엔진, 변속기, 각종 센서 등과 연결된다. 따라서 현대오트론 출범은 정몽구 회장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임과 동시에 현대차의 새로운 먹을거리기도 한 셈이다.
현대차는 현대오트론을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현대모비스 등 핵심 계열사에 인력 도움을 받았으며 시스템 반도체 설계부문에서 경력직 채용 공고를 냈다. 이러한 사실은 인력 유출이 걱정스러운 관련 업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현대오트론이 단기간에 관련 기술을 확보하지는 못할 것으로 내다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지만 현대오트론의 출범 하나만으로도 그 파장이 국내외적으로 만만치 않다. 현재 세계적인 전장 부품회사는 독일의 보쉬, 미국의 콘티넨털과 델파이, 일본의 덴소 등이다. 현대차는 이들 회사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전장부문의 기술력을 높여 이들 업체의 비중을 줄임으로써 수익성도 극대화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들 업체들이 기술협력을 제대로 해줄지 의문이다. 오히려 경쟁업체가 생긴 것에 대해 경계할 가능성이 더 크다.
현대차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인 현대모비스와 관계정립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벌써 현대오트론 출범을 계기로 세계 10위권 자동차 부품 회사로 성장한 현대모비스의 위상 하락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모비스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고 현대오트론은 연구개발에 주력하는 회사”라며 선을 그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