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공방전 롤러코스터 ↗ ↘
▲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의 부인 앤 롬니. 로이터/뉴시스 |
얼마 전 벌어진 ‘전업주부 논쟁’도 그 가운데 하나다. 논쟁의 한가운데에는 롬니의 아내인 앤 롬니(63)가 있다. 발단은 민주당의 선거전략가인 한 여성이 “앤 롬니는 평생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경제 문제를 잘 모른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데서 시작됐다. 이에 발끈한 롬니 측은 “전업주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직업이다”라며 반박했고, 결국 그 같은 발언을 한 여성이 하루 만에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논쟁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번 논쟁으로 인해 그동안 별다른 존재감 없이 남편 뒤에 머물러 있던 앤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과연 부잣집 마나님인 그녀가 미국의 평범한 전업주부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됐으며, 이와 함께 미 유권자들은 배우자들이 대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됐다.
“여성들이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경제문제라고 내 아내에게서 들었다.”
‘전업주부 논쟁’이 시작된 것은 롬니의 이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 말을 들은 민주당의 여성 선거전략가인 힐러리 로젠(54)은 CNN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해보라. 롬니의 아내는 평생 단 하루도 밖에 나가서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때문에 미국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문제, 즉 아이들 양육문제나 교육문제, 장래문제 등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말인즉슨 ‘앤은 부잣집 마나님이므로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이에 롬니 측이 발끈한 것은 물론이었다. 앤은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섯 아들을 키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진 않았지만 나 역시 살면서 매우 힘든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힘든 일’이란 그녀가 현재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으며, 과거 유방암 수술을 받았던 사실을 말한다.
그러면서 앤은 “우리는 여성들의 모든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호소했다.
▲ 롬니 가족. |
로젠의 발언이 미국 주부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당연했다. 트위터를 통해 앤을 두둔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민주당 측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로젠은 현재 민주당이나 백악관으로부터 고용되어 있는 직원이 아니다”라고 못 박으면서 로젠과 거리를 뒀다. 오바마 역시 재빨리 ‘ABC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보다 더 힘든 직업은 없다”며 롬니 부부의 편을 들었다.
이처럼 비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결국 백기를 든 로젠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사과 성명을 발표했으며, “전업주부와 워킹맘을 나누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경제문제를 이야기하려 했을 뿐”이라며 “미국의 워킹맘이 처한 사회적 문제를 꼬집은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로젠의 사과로 일단락되는가 싶던 ‘전업주부 논쟁’은 곧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과연 앤이 미국을 대변하는 일반적인 전업주부 상에 가까운가’하는 것이다.
미국의 웹사이트인 <데일리비스트>는 “아마도 이번 논쟁으로 공화당은 미국의 전업주부들이 앤을 중심으로 한데 결집됐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전업주부들이 공화당에 표를 던져줄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라고 꼬집었다. 이유는 앤이 미국의 전형적인 전업주부들, 더 나아가서는 대다수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형적’이란 의미는 뭘까. ‘전형적인 미국 전업주부’의 모습은 어떤 걸까. 이에 <데일리비스트>는 2007년 ‘미인구조사국’이 실시한 조사를 예로 들었다. 총 560만 명의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실제 전업주부들의 모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업주부 상, 즉 백인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다재다능한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사 결과 현재 미국의 전업주부들은 나이가 어리고, 히스패닉계며, 외국에서 태어났고,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녀의 나이가 15세 이하인 전업주부 가운데 4분의 1은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이 가운데 19%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워킹맘의 8%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과는 대비된다. 이 조사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전업주부 가운데 상당수가 자유의지로 전업주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직업을 가질 만한 기술이 없어서, 혹은 육아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는 직업을 못 가져서 할 수 없이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앤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미국의 평범한 여성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녀를 ‘전형적인 미국의 전업주부’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데일리비스트>는 말했다. 앤은 태어날 때부터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진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이 때문에 다른 많은 여성들이 해야 하는 어려운 선택, 즉 ‘집에서 아이를 키우느냐 아니면 나가서 일을 하느냐’라는 선택 자체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그녀가 어떻게 일반 미국 여성들과 다른지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 가운데 하나인 미시간주 블룸필드 힐스에서 자란 그녀는 상류층 자제들만 다니는 사립학교를 졸업했다. 그녀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해양중장비업체인 ‘제레드 인더스트리’사 회장이었다.
대학 시절 롬니와 결혼한 후 부모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어려움에 처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기댈 부모님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길거리에 나앉을 일은 없었다. 때문에 앤은 평생 아이들이 굶진 않을까, 혹은 가족에게 어떤 난처한 일이 닥치진 않을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녀에게도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발성경화증과 유방암 등 건강 문제로 고생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데일리비스트>는 “아마도 앤은 병원비 때문에 고민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라며 “분명히 최상의 의료혜택을 받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롬니 부부는 미국인의 0.001%에 해당하는 초부유층에 속하며, 보유 재산만 최소 2억 5000만 달러(약 28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앤의 명의로 된 ‘베인 캐피탈’의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신탁도 포함되어 있다.
롬니 부부의 최대 후원자 가운데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눈에 띈다. 이번 대선에서 롬니를 지지하고 나선 트럼프는 지난 17일 자신의 트럼프 타워에서 앤의 생일파티를 직접 주최하면서 우정을 과시했다. 400명이 참석한 이날 파티에서는 평소 승마를 즐기는 앤의 모습을 본뜬 거대한 생일 케이크가 선물로 전달됐다.
한편 지난 18일 CNN이 실시한 미셸과 앤의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71%가 미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응답한 반면, 앤에 대해서는 22%만이 호감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 2004년 대선 당시 남편보다 인기가 높았던 로라 부시. |
▲ 미셸 오바마는 미혼 여성들한테 호감도가 높았다. |
조지 W 부시 ‘부인 마케팅’ 성공
영부인이 대선에 미치는 영향력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번 ‘전업주부 논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냐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영부인이 대선 판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실제 ‘대통령연구센터’가 지난 다섯 번의 대선을 바탕으로 ‘대중인식과 배우자의 매력’에 관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배우자의 인기도와 당락 여부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2~2008년 대선 기간 동안 가장 인기가 많았던 후보 배우자는 무려 76%의 유권자가 호감을 보였던 바바라 부시였다. 이는 남편을 내조하는 전통적인 아내 역할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녀의 인기는 당을 초월했다. 심지어 임기 말에는 남편인 부시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며 특히 노년층과 여성, 그리고 고학력자들 사이서 인기가 높았다. 바바라의 이런 높은 지지율은 과연 남편의 재선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을까. 놀랍게도 1992년 빌 클린턴과 맞붙었던 부시는 재선에 실패했고, 이는 바바라의 높은 지지율이 남편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반면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호감도는 바바라의 절반밖에 못 미쳤으며, 비호감도는 바바라의 두 배에 달했었다. 이유는 힐러리가 기존의 영부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왠지 거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정반대였다. 힐러리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보란 듯이 재선에 성공했다.
이와 달리 로라 부시는 남편 부시의 대선가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힐러리에 비해 조용하고 전통적인 영부인 상이었던 로라는 2000년 대선 당시만 해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로라의 호감도에 대해 묻는 여론조사 당시 56%가 ‘모른다’라고 답했을 정도로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도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4년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2004년 로라의 인기는 남편인 부시보다 더 높아졌으며, 이 점을 염두에 둔 공화당 측은 아예 선거 기간 동안 로라를 전면에 내세웠다. 여성 유권자를 의식한 부시 측은 ‘조지 W 부시의 W는 여성(Women)입니다’라는 선거 캠페인을 벌였으며, 덕분에 부시는 기혼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싹쓸이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실제 2004년 대선 때는 2000년 대선에 비해 700만 명의 여성들이 더 부시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신디 매케인과 맞붙었던 미셸 오바마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둘은 각각 44%와 40%의 비슷한 지지율을 보였지만 기혼 여성들의 표를 더 많이 얻은 쪽은 신디였던 반면, 미혼 여성들의 호감을 샀던 쪽은 미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배우자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유권자들이 후보자에게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자의 높은 인기가 후보자의 당선을 확실히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유권자들은 후보자의 정책, 성향, 속성 등에 따라 의사 결정을 하며, 여기서 배우자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부일 뿐이라고 <데일리비스트>는 전했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