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번역한 천병희 과거 ‘동백림 사건’ 징역…윤 대통령·김기현의 신영복 비판과 어긋나
이 책은 출판사 숲에서 2011년 발행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500여 년 전 그리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쓴 책으로,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약 27년간 고대 그리스 신흥 강대국 아테네와 전래 패권국 스파르타가 그리스 지배권과 문명의 표준을 두고 다툰 전쟁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 번역가는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의 대가’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다. 천 명예교수는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독문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2004년 단국대 독문과 교수 정년퇴직 전후 30여 년 동안 하루 6시간씩 고전 번역 작업을 계속해 40여 종의 고전을 번역했다. 플라톤 전집 7권을 완역한 것은 물론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도 그의 손을 거쳤다. 천 명예교수는 2022년 12월 23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그의 생애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동백림 사건’이다. 천 명예교수는 1966년 독일에서 돌아와 서울대 독어교육과 전임강사가 됐지만 이듬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다. 중앙정보부가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예술가 등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활동을 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는데, 천 명예교수도 간첩으로 지목됐다.
천 명예교수는 훗날 “유학 당시 호기심에 동베를린으로 북한 유학생을 만나러 간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될 줄 몰랐다”고 회고했다.
천 명예교수는 이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3년 2개월의 옥고 끝에 특별사면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출감해서도 ‘자격정지 10년’이라는 사슬에 묶여 교직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고전 문헌 번역을 본격화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간첩단으로 포장했다며 정부가 사건 관계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앞서 3·8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윤심’을 등에 업은 것으로 알려진 김기현 후보는 경쟁상대인 안철수 후보에 대해 “과거 2016년 국가 전복을 꾀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던 신영복의 빈소를 찾아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께서 너무 일찍 저의 곁을 떠나셨다’고 발언했다”며 “지금도 공산주의 대부 신영복이 존경받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밝혀야 한다”고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이어 일부 언론에서는 대통령실 핵심 고위 관계자가 “윤석열 대통령은 안철수 의원이 신영복 교수에 대해 존경의 뜻을 밝힌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미리 알았다면 (대선 후보) 단일화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당대표 후보의 ‘색깔론’ 시각에 따르면 한동훈 장관 역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여러 번역본 중 과거 간첩 혐의를 받은 바 있는 천 명예교수의 책을 자신의 이미지메이킹에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한편 법무부에 따르면 한 장관은 3월 7일부터 15일까지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3개국을 방문해 출입국·이민 정책을 살필 예정이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