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 박차고 ‘명품인생’ 개척
▲ 김성주 회장은 “MCM을 5년 내에 루이뷔통과 겨루는 기업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 ||
집안에서 반대하는 국제결혼을 자기 뜻대로 강행하는가 하면 물려받은 것이 아닌 자신의 사업까지 형제들이 가져가려하자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지켜냈다. 그리고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는 물론 자신의 이름을 딴 홈페이지까지 운영하면서 방문자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한다.
재벌 2세이자, 자수성가형 사업가 겸 여성운동가, 싱글맘이 바로 김성주 회장이다.
김성주 회장이 사업가로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MCM 브랜드를 사들인다는 깜짝 뉴스를 내놓으면서부터다. 물론 김 회장이 이끄는 성주인터내셔날과 성주디앤디는 매출액이 각각 128억 원과 580억 원, 순이익이 30억 원에 달하는 실적을 올린 중견기업군이다.
MCM 브랜드의 핸드백 등을 제조 판매하던 성주인터내셔날은 지난 2005년 11월 MCM브랜드를 사들였다. MCM의 라이선스 제조업체에서 출발해 브랜드 자체를 사들인 것이다. 국내에서 이런 사례는 스포츠 브랜드인 필라의 경우를 빼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했기에 화제를 모았다. 더구나 고가의 사치재로 분류되는 ‘명품’은 해외에 일방적으로 돈을 갖다 받쳐야 하는 부자들의 튀는 ‘쇼핑 습관’쯤으로 치부돼 왔기 때문에 거꾸로 외국 명품 브랜드를 사들여 세계를 상대로 돈을 벌겠다는 김 회장의 발상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김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자체 브랜드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어렵다면 우선 외국 브랜드를 우리 것으로 만들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김 회장은 MCM 상표를 단 제품의 기획과 생산, 판매를 총괄하는 MCM프로덕트를 사들였다. 그가 전세계에 MCM 상표를 단 물건을 기획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유럽에서 유명세를 타던 MCM은 최근 김성주 회장이 경영하는 한국 시장만 빼고는 유럽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MCM본사에서 김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 회장은 2004년 말부터 MCM본사와 전략적 파트너십 계약을 맺고 2005년 3월부터는 MCM홀딩스의 이사로 들어가 글로벌 경영에 참여하다가 본사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외명품 수입과 라이선스 제조를 통해 명품 비즈니스를 배운 다음 명품 비즈니스의 주체로 나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김성주 회장의 명품 비즈니스는 취미삼아 고가 사치품을 수입하는 재벌2세의 사업과는 다르다. 그가 여기에 전력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주인터내셔날이 대성그룹에서 사실상 분리선언을 하게 된 계기가 됐던 지난 2001년의 경영권 분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 2001년 6월 28일 김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대성산업이 성주인터내셔널의 알짜 사업인 MCM 관리권을 뺏으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성그룹의 2세 체제 전환 과정에서 형제간 재산분쟁이 매끄럽지 않았고, 이 와중에 김성주 회장이 자신의 몫을 건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대성그룹은 그 해 2월 창업주 김수근 회장이 타계하자 형제끼리 재산분할을 하면서 말썽이 났다. 이는 98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외환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성주인터내셔날도 부도위기를 겪었고 모기업인 대성그룹의 지원을 받아 버틸 수 있었다. 그때 유입됐던 대성그룹의 지원자금 30억 원이 단초가 돼 대성그룹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며 형제간 분란이 생긴 것이다.
이는 결국 김 회장의 회사로 인정되고 사태가 해결됐다.
그의 이력을 보면 재벌 2세가의 이력 치고는 특이하다.
재벌 2세 여성 중 외국유학까지 하는 경우는 40대에는 전무하다시피하다. 대개는 국내에서 대학 졸업하고 비슷한 또래의 재벌가 2세와 결혼하는 게 상례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중매결혼을 추진하자 외국으로 유학을 갔고 외국인과 결혼해 집안의 후원을 스스로 끊었다. 집안의 후원이 사라지자 미국 유명 백화점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혼하면서 국내에 되돌아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에게 이런 강렬한 도전의식을 심어준 것은 그가 고등학교 2학년 겪은 넷째 오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막내 오빠가 대학진학에 실패한 뒤 세상을 버린 것. 그가 가장 잘 따랐던 오빠의 죽음을 보면서 그는 ‘안락함이 보장된 피동적인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치열한 삶을 이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사건 이후 집안이 반대하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 걸어나갔다.
1989년 귀국 뒤 대성산업에 입사해 일을 하면서 대성그룹이 추진하던 외국 합작사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자 그 대가로 부친이 30만 달러를 빌려주었고 그 돈이 바로 성주인터내셔날의 종잣돈이었다. 미국의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에서 일해본 소매유통업의 경험과 도전 정신이 성주인터내셔날을 만든 셈이다.
그의 사업 모토는 투명경영이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김 회장은 부패관행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술대접이나 골프 사교를 하지 않을 것이며 흰봉투(뇌물)를 돌리지 않고, 세금을 제대로 내겠다는 것. 그는 90년대 두 차례의 세무조사를 받았지만 흠이 잡히지 않았다.
사업적으로 보면 성주그룹은 대략 세 단계를 거쳤다.
구치 제품 수입으로 재미를 본 뒤 신흥 대중 명품으로 통하는 MCM의 국내 제조판매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제조업에 손대면서 좀 더 규모가 커지게 됐다. 단순한 수입업체에서 제조까지 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MCM 본사까지 인수하면서 세계적인 비즈니스 단계로 진입하게 됐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사업구조조정도 이루어졌다.
형제 간에 분란의 씨앗이 됐던 성주인터내셔날의 지분율은 김성주 회장이 75%, 오빠들이 나머지 25%를 갖고 있다. 성주인터내셔날은 성주그룹의 가장 큰 수익원인 MCM 브랜드를 취급한다. 그는 이를 2002년 설립한 성주디앤디로 넘겼다. 성주디앤디의 지분은 김 회장 100%. 대신 성주인터내셔날은 룰루기네스와 빌리백을 취급하고 있다. 또 영국에서 수입하는 막스앤스펜서(M&S)는 성주머천다이징에서 취급하는 삼각체제로 재편했다.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MCM과 M&S는 김성주 회장의 지분이 100%인 회사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부 체제 정비 끝에 그는 MCM 본사 인수라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MCM을 인수하면서 “MCM을 5년 내에 루이뷔통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 명품기업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그의 호언대로 MCM이 5년내 한국시장에서만 통하는 메스티지(대중 명품)가 아닌 파리와 밀라노, 도쿄에서 루이뷔통, 구치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고가 사치품 대열에 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성주의 말말말]
▲패션에 대해서는 맨 나중에 읽거나 생각한다. 패션이 사회의 반영인 만큼 당연히 사회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사업은 딱 두 가지를 본다. 브랜드의 잠재력과 사람들. 구치에서 한국 시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하루 만에 수락했다. 다들 무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무렵 구치가 ‘할머니 브랜드로 이미지가 시들어 있긴 했어도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MCM의 한국 내 판매를 부탁 받았을 때 수락했던 이유도 역사가 짧은 이 브랜드가 새로운 명품이 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네통의 제안은 거절했다. 베네통의 아웃소싱 영업팀이 싫어서였다. 함께 일하는 사람끼리 믿고 좋아하지 않으면 지옥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주가 외국의 유명 사치성 브랜드를 들여와서 팔아먹고 있는 게 아니냐고 비난한다. 그러나 내가 수입하는 것은 그네들이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올린 노하우다. 그 기술을 한국적인 것으로 전환하여 더 많은 물건을 외국에 파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그 좋은 예가 MCM 핸드백이다. 구치 브랜드를 취급하며 배운 노하우로 한국산 고급 핸드백으로 최고의 사업부를 만들었고, 또한 미국 시장에도 많은 수출을 할 수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 겉은 아름다운데 속은 너무 나약해요. 장차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사람이 바로 여자들인데 말이죠. 그래서 전 여자도 군대에 가야한다고 생각해요.(2004년 올해의 여성상 수상 소감 중)
▲남자만큼 일하지 않으면서 남자들과 똑같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역차별이자 언어도단이다. 여자, 남자가 경쟁할 게 아니라 서로 강점을 조화시켜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 나라 밖 경쟁자를 이겨야 한다.
▲여성들이 잠을 자고 있으니 인구 절반의 브레인 파워가 잠자는 격이다.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서 일하고 봉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나의 의무는 (의무를 다하도록) 한국 여성의 잠을 확 깨워놓는 것이다.
▲무엇이 되겠다고 미리 작정한 것은 없었는데 내면에 감춰진 재능을 하나씩 찾아내고 행동에 옮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아버지가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주식 1주, 땅 한 평 주지 않았지만 그 대신 더 큰 것을 물려받았다. 바로 사업가의 피다.
[김성주 회장 프로필]
1956년 경북 대구 출생
1975년 이화여고 졸업
1981년 연세대 신학과 졸업
~85년 런던정경대학원 수료,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수료(기독교 윤리/경제학)
1985년 미국 블루밍데일사의 회장 직속 기획팀 근무
1989년 귀국, 대성산업 입사
1990년 성주인터내셔날 설립
200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관 제19회 올해의 여성상 수상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