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이후 손익분기점 넘은 한국 작품 전무…티켓 값 상승 탓 영화관 찾는 일반 관람객 급감
‘코로나19 쇼크’ 탓으로만 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게 영화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2019년 말부터 약 3년 동안 이어진 코로나19 암흑기로 직격탄을 맞았던 멀티플렉스 업계는 2022년 코로나19의 풍토병화(엔데믹·Endemic) 이후 조금씩 숨을 붙여가는 반면, 한국 영화들은 여전한 흥행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22년 5월 ‘범죄도시2’의 코로나 시국 첫 1000만 관객 달성으로 영화계 정상화의 불씨가 보이는 듯했으나 일부 블록버스터 작품을 제외하면 제작비조차 제대로 회수하지 못할 정도의 흥행 참패가 지속됐다.
2022년 12월 이후 개봉한 국내 영화 가운데 손익분기점을 넘은 작품은 전무하다. 동명의 롱런 인기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CJ ENM의 야심작 ‘영웅’은 촬영 종료일로부터 약 3년 만인 2022년 12월 개봉했으나 3개월 동안 손익분기점인 350만 명을 끝내 넘지 못하고 VOD 시장으로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2년 만에 개봉한 영화 ‘유령’ 역시 박스오피스 1위를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채 손익분기점인 335만 명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66만 명의 관객 수로 흥행 대참패 기록을 세웠다.
임순례 감독과 황정민, 현빈이 함께한 영화 ‘교섭’도 실관람객의 혹평 속에 손익분기점 350만 명의 절반 수준인 172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개봉 1주 차에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면서 설 연휴 특수를 누린다면 흥행 청신호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2주 만에 ‘아바타: 물의 길’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밀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배우 진선규의 첫 주연작 ‘카운트’(2월 22일 개봉), 차태현‧유연석 주연의 ‘멍뭉이’(3월 1일 개봉) 역시 신통치 않은 관객 동원으로 개봉 첫 주 차부터 흥행 적신호가 켜지기도 했다. 3월 17일 기준으로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한국 영화는 김다미‧전소니 주연의 ‘소울메이트’와 조진웅‧이성민‧김무열 주연의 ‘대외비’ 두 편뿐이다. 이마저도 ‘대외비’는 개봉 3주 차임에도 손익분기점인 195만 명에 한참 미치지 못한 70만 관객의 문턱에 머물러 있어 사실상 흥행 실패 성적표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영화의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빈집털이’에 나선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다. 지난 1월 4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초기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막강한 원작 만화 팬덤과 실관람객의 입소문을 바탕으로 3개월째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국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종전 흥행 1~2위였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5년 개봉, 최종 관객수 301만 5165명),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2016년 개봉, 최종 관객수 373만 2561명)을 넘어 3월 12일 기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기에 이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과 국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순위 4위를 기록했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2020)의 후속작 ‘귀멸의 칼날: 상현 집결, 그리고 도공마을로’도 개봉 후 줄곧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경우는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올해 최단기간 100만 관객을 돌파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기록됐다.
이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흥행 약진을 두고 “‘No JAPAN(일본 제품 보이콧 운동)’에 피로감을 느낀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Yes JAPAN’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업계 시각은 다르다.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관람층이 정해져 있어 일본에 대한 사회적 호불호 기류와는 상관없이 고정 관람객들이 언제든지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관람객의 ‘일반 영화 외면’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한 영화 홍보 담당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경우 원작 만화인 ‘슬램덩크’의 오랜 팬들이 약 30년 전부터 존재했고, 현재는 1020 젊은 세대 ‘덕후’(마니아를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의 한국식 신조어)들이 새로 유입되면서 막강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덕후들은 원래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만 n차 관람(같은 작품을 여러 차례 관람하는 일)하기 때문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관객 수가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일”이라고 짚었다. 마찬가지로 ‘스즈메의 문단속’과 ‘귀멸의 칼날’도 각각 감독과 작품에 팬덤이 형성돼 있어 이전처럼 관객 수가 유지되고 있을 뿐 별도의 분석이 필요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영화업계에선 올라갈 대로 올라간 티켓 가격 탓에 영화관의 문턱이 높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올해 흥행한 애니메이션 작품처럼 볼 사람만 보는 기류가 고착된다면 결국 투자사와 배급사는 무조건 흥행이 되는 작품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우려 지점이다.
실제로 3월 15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영화 관람가격이 지난해 대비 7.4% 상승하면서 관객들의 소비 성향도 다양한 작품 관람을 시도하는 것에서 보고 싶은 영화만 선택하는 것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로 2월 한국 영화 매출액과 관객 점유율이 2004년 이후 동월 최저치를 기록해 앞으로의 한국 영화도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영화사 관계자는 “왜 해외 작품만 보냐고 관객에게 흥행 실패의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일반 관객들이 왜 영화관을 외면하고 있는지부터 살피는 게 순서”라며 “아무리 좋은 작품을 내놓더라도 티켓 가격이 내리지 않는 이상 관객들은 작품을 선택할 때마다 ‘내가 낸 돈 값을 하는지’ 꼼꼼히 따질 수밖에 없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티켓 값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짚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