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처럼 보여드리려 악썼는데 꽤 귀여워 보였어요”…촬영중인 ‘경이로운 소문 2’에선 백금발·숏컷 변신
※이 기사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오디션에 붙었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 기분이 좋고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저를? (저에 대해) 아직 아무 것도 못 보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아직 TV 연기로 많은 것을 보여드리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런데 감독님과 작가님이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건 좋은 말로 하는 건데 네 눈과 눈빛의 강렬함, 몽환적인 그런 게 사라 캐릭터랑 적합했어. (사라 닮았다는 거) 욕 아니야, 오해하지 마’였어요(웃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어린 시절 지독한 학교폭력으로 지옥을 맛봐야 했던 주인공이 가해자들을 향해 인생의 마지막 처절한 복수를 이루는 이야기다. ‘더 글로리’에서 김히어라가 연기한 이사라는 약물에 중독된 예술가이자 모태신앙의 크리스천이다. 등장하는 어떤 가해자보다 ‘돌아버린’ 눈빛을 가진 그는 자신의 학교폭력 가해자로서 지저분했던 과거를 이미 신이 용서했다고 믿는다.
보신을 위해 죄책감을 가장하고서라도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 분)에게 용서를 비는 최혜정(차주영 분), 죄책감을 가질 이유 자체가 없다고 믿으면서도 이 사실이 밝혀질까 전전긍긍하는 박연진(임지연 분)과 달리 이사라는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관망하는 태도를 취한다. 김히어라는 이사라의 이런 캐릭터성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해석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사라는 연진, 재준과 달리 혜정이나 명오처럼 자기보다 급이 더 낮은 친구들과도 기꺼이 말을 섞어 줘요. 그런 걸 보면 아마 사라는 뭔가를 원해서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냥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지 않았나 싶어요. 처음부터 많은 것을 가졌지만 삶의 의지가 거의 없는 인물이라서 친구에게 뭔가 목적을 가지고 계산적으로 대한다기보단 그냥 내 옆에 있는 ‘사람’ 그 자체로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명오나 혜정이가 자길 건드려도 ‘어어’ 하면서 넘기다가 조금 선을 넘는 것 같으면 그제야 살짝 경고하기만 하는 식이에요. 어떻게 보면 더 못된 인간인 거죠. 동은이도 마찬가지로 그냥 내 옆에 있는 연진이가 괴롭히는, 좀 재미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소 20년 가까이 약물중독 상태인 인물을 연기해야 하다 보니 준비 역시 철저해야 했다. 주로 유튜브에 올라온 마약 중독자의 재활 다큐멘터리를 통해 중독 과정과 단약 부작용, 재활까지의 변화를 꼼꼼히 살펴본 뒤 캐릭터에 하나씩 입혀나갔다는 김히어라의 연기는 ‘더 글로리 파트 2’가 공개되자마자 단연 핫이슈가 됐다. 특히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일부 마약류 사용이 합법인 네덜란드로 보내 달라며 부모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장면 때문에 채널A 육아 예능 프로그램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아이들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인 ‘금쪽이’를 딴 별명이 붙기도 했다.
“누가 그걸 보고 ‘오은영 선생님도 포기한 금쪽이’라고 하셨더라고요(웃음). 그때 사라는 빨리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목표가 확실한 상황이었는데 엄마 아빠가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마구 떼를 쓰는데, 대본에 지문으로는 ‘(사라의 떼 쓰는 모습이)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 같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게 딱 꽂히더라고요. 사탄에 들린 것처럼 막 악을 지르면서 해야겠다! 그래서 배를 뒤집어 까고 ‘엑소시스트’ 영화처럼 기괴하게, 사탄처럼 보여드리려고 악을 썼는데 보니까 의도한 건 아닌데 꽤 귀여워 보였던 것 같아요(웃음).”
작품마다 명대사를 연달아 뽑아내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인 만큼 ‘더 글로리’ 역시 캐릭터별 명대사가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특히 종교 용어가 섞인 독특한 대사로 눈길을 끌었던 이사라의 대사 중 파트 1과 파트 2를 아울러 배우의 머리마저 ‘띵’하게 만들었던 두 개의 대사가 있었다고.
“사라가 동은이에게 ‘넌 이제 천국 못 가. 난 갈 수 있는데, 회개해서 구원 받았거든’ 이 대사가 저한테도 ‘띵’하고 오는 게 있더라고요. 이게 사라가 믿고 살아가는 생각 그 자체일 텐데 시청자나 동은이 입장에선 정말 기가 차는 그런 느낌인 거죠.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대사인데 마지막에 사라가 동영상을 올리면서 ‘해브 어 나이스 데이다! 씨XX아!’ 하는(웃음).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정말 사라스러운 대사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야, 다 같이 한 번 죽어보자’ 하는 느낌이 딱 사라 그 자체(웃음).”
그런가 하면 사라의 말로를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선 “연진보다 더 끔찍한 결말”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피의자가 된 데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떨어뜨리려 한 혜정에 대한 살인미수까지 저질러 법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는데, 거기에 ‘보복성 음란물’의 피해자까지 됐다. 가장 지독한 가해자였지만 죗값을 받고 나면 대중들의 관심에서 쉽게 잊힐 수 있는 연진에 비해 사라가 더 가혹한 복수를 당한 것이 아니냐는 시청자들의 분석에 김히어라는 “그런 시각은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놀라워했다.
“모든 캐릭터가 전재준만큼 한 방씩 먹었으면 아주 시원하게 끝났겠지만, 각자 현실적인 면을 하나씩 둔 것 같아요. 사라의 경우도 그 이후 죗값을 치르고 나와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훨씬 더 지옥일 테니까요. 마약도 끊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의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모든 사람들이 사라를 포기한 상태일 텐데 그것이야말로 학창시절 동은이의 입장인 거잖아요. 가장 소외된 약자의 입장에서 그걸 감당하며 나아가야 하는 게 동은이가 생각한 사라의 지옥인 거죠. 그런데 보복성 음란물로 생각한다면 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겠네요, 그건 새로운 시각 같아요(웃음).”
2009년 뮤지컬 ‘잭 더 리퍼’로 배우 데뷔 후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해 오던 그가 TV로 무대를 옮기기 시작한 것은 2021년이다. 최근 2~3년 사이 작지만 강렬한 역할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 왔던 김히어라는 ‘더 글로리’ 전후로 확실한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작품이 잘되면 이렇게 잘되는 거구나”라는 신기함과 설렘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지는 책임감에 짓눌려 부담으로 변해갈 때 즈음 그를 지탱해준 것은 동료 배우들이었다.
“매체 출연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걱정이 됐었어요.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도 그렇고, 대본도 너무 많이 들어오다 보니 어떻게 좋은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임)지연이와 (차)주영이가 제게 ‘언니, 너무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체할 만큼 하지 않아도 돼. 언니는 너무 잘하는 사람이고 우리도 언니를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라고 말해줬어요. 또 (송)혜교 언니도 ‘널 믿어. 넌 뭘 선택해도 다 잘해낼 수 있을 거야’라며 많은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셨는데, 그게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정말 ‘더 글로리’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같아요.”
2022년 12월 공개된 파트 1부터 전세계적인 열풍으로 몰아친 ‘더 글로리’를 넘어선 김히어라는 오는 7월 방영할 tvN 토일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시즌 2’ 촬영에 한창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백금발 탈색과 짧은 숏컷으로 변신한 그는 “아직 머리가 익숙하지 않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자신조차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흥행 여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다음 작품에 임할 수 있는 것 역시 ‘더 글로리’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약속 덕이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지연이, 주영이, (박)성훈 오빠(전재준 역), (김)건우(손명오 역) 모두 제가 느끼기에 그릇이 작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작품 하나가 잘됐다고 ‘그거 오롯이 내 거야’ 하면서 들뜨지도 않고, 반대로 너무 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으면서 잘 감당하고 차분하게 다음 행보를 향해 건강하게 잘 나아가는 점이 그래요. 혜교 언니도 저희에게 ‘이건 곧 지나가니까 그냥 지금을 즐기고 건강하게 잘 넘기자’고 말해주셨어요. 지금 너무 들뜰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곧 잊힐까봐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요. 다들 잘하는 사람들이니까 체하지 않고 계속 잘하다 보면 또 좋은 순간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아가는 면이 너무 건강하고 좋더라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