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이 자해로? 24시간 밀착감시 특명
▲ 1989년 7월 8일 항소심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대법정으로 들어가는 김현희. 연합뉴스 |
수사관이 심문을 계속했다.
“긴(金).”
그녀의 입에서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치 않은 발음이었다.
“뭐라고, 김이라고?”
수사관이 재차 물으면서 종이에 써 보였다.
“옳지. 쇠금자 말이지? 음… 김. 그리고 이름은?”
“켄(賢).”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말인지 한국말인지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 현이라고?”
주무 수사관이 흥분하여 묻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희.”
그녀에게서 다시 대답이 흘러나왔다. 수사관은 종이에 김현희라고 쓰고 그녀에게 확인했다.
“김현희, 이게 맞지?”
김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12월 23일. 그녀가 서울에 온 지 1주일 만의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한없이 초조하고 길었던 기간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수사관으로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심문을 하던 수사관은 그녀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라고 하면서 방을 나오고, 나와 몇 명의 수사관만 들어가게 했다. 내가 다시 심문실로 들어서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미안한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얘가 한국말을 하네?”
나는 웃으면서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슬쩍 내 팔을 친 다음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이제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찾은 것이다. 이런 극적인 모습이 언론에 나가면서 당시 유행어였던 ‘언니, 미안해’가 되었다.
그날 밤 우리 수사관들에게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자백을 하고 난 후에 허탈감이나 후회로 자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서 관찰하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심문실에 온 이후에도 수사관들은 24시간 감시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잠드는 10시경 이후에는 실내조명을 낮추고 남녀 수사관 각각 1명씩 침대 옆 소파와 책상 의자에서 계속 감시해야 했다.
안기부 수사관이 화려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처럼 남모르게 고생을 하는 일도 많다. 자백 이후로는 더욱 경계를 갖추고 그녀를 감시해야 했다. 새벽 2~3시경이면 쏟아지는 졸음과 함께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올리고 있으려니 견디기 어려웠다. 안기부 생활은 어떻게 보면 고난의 생활이기도 했다. 어떨 때는 오히려 잠을 자고 있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때 당시 내 눈가의 잔주름이 지금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가까워졌다. 수사관들은 그녀에게 다시 서울 구경을 시켜주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직접 차에서 내려 시내를 걷기도 하고 쇼핑도 하는 등 서울 체험을 시켜주기로 하여 나는 바짝 긴장했다. 이런 서울 구경은 남파간첩이나 귀순자들이 오면 흔히 있는 절차다. 그들이 아무리 사상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 깜짝 놀라면서 전향하는 일이 많았다. 북한에서는 한국의 실상을 그대로 교육하지 않고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로 서울구경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현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는 일은 신변 보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이미 텔레비전에 얼굴이 공개되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 무렵 명동으로 차를 타고 나가 적당한 곳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나와 다른 남자수사관은 마유미 옆에서 같이 걸었고 많은 수사관들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함께 주위를 경계하면서 동행했다. 그녀를 마음으로부터 변화시키기 위해 번화가로 나갔지만 솔직히 누가 알아보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연말연시라 거리는 들떠 있고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명동의 롯데백화점도 연말을 맞아 물건들을 휘황찬란하게 전시하고 있었으나 사방을 경계하느라고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지날 때마다 점원들이 가까이 다가와 물건들을 소개하며 매장으로 들어오라고 인사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깜짝깜짝 놀라는 기색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고 싶은 것 있으면 사.”
김현희에게 권하자 그녀는 망설이면서 스카프를 하나 샀다. 롯데백화점에서 나와 남대문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남대문시장에는 상인들이 물건을 산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거나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김현희는 남대문시장의 흥청대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보았다.
“저 사람은 거지예요?”
김현희가 구세군 자선냄비를 보고 물었다.
“저건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는 거야.”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김현희는 다시 남산의 조사실로 돌아왔다. 서울의 발전한 모습을 본 그녀는 말도 없었고 표현도 안했으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백 이후로 수사는 급진전을 띠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선인 것이 누구나 궁금해 하는 KAL기에 대한 진실이었다. 도대체 KAL기는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심문에 들어간 수사관은 우선 그녀의 기본적인 인적사항에 대해서 조사했다.
“북한 주소가 어떻게 돼?”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
“언제 태어났어?”
“62년 1월 27일이요.”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야?”
“북한 정무원 외교부 지도원이었어요. 아버지 성함은 김원석이고 어머니 성함은 림명석이에요.”
“형제는?”
“2남2녀 중 장녀예요.”
“어릴 때 어디서 살았어?”
“내가 한 살 때인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하게 되어 쿠바에서 살았어요.”
“쿠바에서 언제 북한으로 돌아왔어?”
“네 살 때인가 다섯 살 때 돌아왔어요.”
김현희는 북한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것 같았다. 그녀는 67년에 북한으로 돌아와 68년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 하신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4년제인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성구역 중신동 중신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77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다니다가 78년 9월에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그럼 언제 공작원이 되었어?”
“80년 3월에 중앙당에 소환되어 80년 4월 7일 공작원양성소인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어요. 공작원 속성정보반 소속으로 81년 4월 17일까지 1년 동안 교육받았어요. 그리고 거기서 83년 4월 중순까지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본에서 납치된 일본 여인인 이은혜와 합숙하면서 교육을 받았어요.”
▲ 2009년 김현희가 일본에서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 씨(이은혜)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 씨와 만나 포옹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87년 9월 20일 마카오에서 밀입국 난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준다는 정보에 따라 김숙희와 함께 마카오로 갔다. 이때도 28세의 현존인물인 우잉으로 위장했다.
87년 10월 김현희에게 단독으로 입국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동북리2호 초대소로 돌아와 김승일과 함께 수용되어 일본인 부녀지간으로 위장하여 KAL기를 폭파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87년 11월 12일까지 폭파 계획을 수립했다.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북한 노동당 대외정보조사국 조사2과 소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가장 중요한 KAL기에 대해 심문에 들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누구나 궁금해 하는 것이 KAL기에 관한 것이므로 먼저 KAL기에 대해 물어보겠다. KAL기는 어떻게 했지?”
김현희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 이제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진행시키자. 어서 말해봐.”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약으로….”
김현희는 가느다랗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폭약을 라디오로 위장했군? 그걸 어떻게 했지?”
수사관은 흥분으로 고조되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물었다.
“하치야 신이치라는 가명을 쓴 김승일과 함께 KAL858기에 탄 후 9시간 후 터지도록 장치한 라디오와 액체폭약을 비행기 선반위에 놓고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렸습니다.”
김현희의 자백이 이어졌다. 혹시라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묵비권을 행사할까봐 심문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수사관들은 이 상황을 위에 긴급히 보고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