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때 배터리만 압수했다면…
▲ 2009년 김현희가 일본어 교사였던 다구치 야에코 씨(이은혜)의 아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김현희는 때때로 오스트리아 여자들이 부러웠다.
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특히 빈은 예술의 도시답게 극장이 많고 거리에서도 음악회 등이 자주 열렸다. 쇼핑을 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들뜨고 한편으로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밤이 되자 호텔의 창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평양과는 다르게 빈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김현희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북한에서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오고 스쳐갔다. 임무를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실패하면 죽어야 할 것이고 성공하면 평양으로 돌아가 영웅 칭호를 받게 될 것이다.
공작은 김승일이 주도하고 그녀는 보조원에 지나지 않았다. 김승일은 나이가 많았으나 오랫동안 공작원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었다. 그의 지시대로 따르면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김현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고 밤이 늦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세수를 하고 호텔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초대소에 있을 때도 음식은 잘 나왔지만 호텔에서 먹는 식사도 흡족했다. 북한에서 호텔은 특권층만 이용을 하는데 김현희는 자신이 마치 특권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호텔 식사는 깔끔해.’
호텔의 조찬 식사는 대개 계란 프라이, 빵, 우유, 주스, 베이컨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북한에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2일 오전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김현희는 김승일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오후가 되자 김승일이 오스트리아 주재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최 과장과 통화했다. 최 과장은 본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작 지도를 해온 사람이 분명했다. 김승일은 최 과장에게 비행기 표를 구입한 사실에 대해서 보고하고 27일 저녁 7시 베오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인가요?”
김현희는 김승일이 통화가 끝나자 물었다.
“그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지.”
김승일이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일체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김현희가 가족에 대해서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수수께끼 같은 공작원이구나.’
김현희는 김승일이 노련한 공작원이라고 생각했다.
23일 오전 11시경 김현희는 김승일과 함께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뒤에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김승일의 표정은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공항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빈과 북한을 비교해 보았다. 북한의 순안 비행장은 남루했으나 오스트리아 빈 공항은 깨끗하고 관광객들이 많았다.
김현희는 공작을 수행해야 할 장소가 가까워지자 점점 긴장이 되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출국수속을 마치고 14시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빈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18시경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약 4시간 정도 비행기를 탄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어느 사이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메트로폴리탄호텔로 달려갔다. 베오그라드는 수백 년이 된 고색창연한 도시였으나 빈과는 달랐다. 거리의 풍경들이 어쩐지 잿빛으로 음울해 보였다.
24일 김현희는 전차를 타고 시내관광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혹시라도 서방 정보원들의 의심을 받을까봐 관광객 행세를 한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유럽과 발칸 제국 사이에 있는 도시로 하얀 성채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 동쪽의 도나우 강변 언덕 위에 있는 ‘칼레매그단 성채’는 3~4겹의 방어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했다. 20세기에 거의 20년마다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고 허물어진 건물이 아직도 있었다. 성 입구에는 19세기에 사용되었던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전쟁이 많은 나라야. 외세의 침략을 자주 겪었지.”
김승일은 간간이 베오그라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자신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으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 독재자가 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과는 다르게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최 과장과 약속한 27일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공작 임무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김현희는 때때로 자신이 순수한 관광객이었으면 싶었다.
25일에도 김현희는 베오그라드의 번화가와 사원들을 관광하며 스웨터 1개를 샀다. 최 과장과 약속한 날이 사흘이나 남아 있었다. 베오그라드는 날씨가 쌀쌀한 편이었다. 이미 가을이 깊어 있었다. 26일에는 베오그라드에 있는 오스트리아 항공사에 가서 로마에서 빈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구입했다. 공작원들에게 시간이 남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시간이 남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7일도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다. 김현희는 낮 동안에 거리 구경을 했다. 저녁 7시가 되자 호텔 정문으로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이 찾아왔다.
“동무들, 수고가 많소.”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이 김승일과 악수를 나누었다. 김승일이 주위를 살핀 뒤에 그들을 데리고 호텔방으로 올라왔다.
“이 라디오에 폭약이 들어 있소. 동무가 시간을 조절하면 정확하게 터질 것이오.”
최 과장이 김승일에게 폭약이 들어 있는 라디오 사용법을 설명했다.
“플라스틱 폭약이오?”
김승일이 최 과장에게 물었다.
“그렇소.”
“이 작은 것으로 비행기를 폭파할 수 있소?”
“충분하오. 플라스틱 폭약은 공항 검색대도 통과할 수 있소. 약주병은 액체 폭약으로 비행기를 산산조각 낼 것이오.”
최 과장은 가지고 온 폭파용 라디오와 액체 폭약이 들어있는 약주병을 김승일에게 넘겨주었다. 김현희는 그들이 폭발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나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필요 없는 짐은 우리가 가지고 가겠소.”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은 10분쯤 호텔에서 머물러 이야기를 한 뒤에 김현희와 김승일이 가지고 다니던 여행용 가방 1개를 가지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 가방에는 잡다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내일은 남한 비행기를 타야 하는구나.’
김현희는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바짝 긴장되었다. 비행기를 폭파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28일 오전 11시경에 체크아웃을 한 뒤에 공항으로 나갔다.
“긴장할 필요 없어.”
김승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현희는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이라크 항공으로 바그다드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라크 비행기에 탑승하자 승무원들이 탑승객들의 소지품을 검열하여 배터리를 압수했다.
“배터리를 압수했으니 어떻게 하지?”
“공항에 내리면 돌려준다잖아요?”
김현희는 김승일이 긴장하는 것을 보고 낮게 말했다. 비행기는 예정된 대로 오후 14시35분에 이륙했다. 비행기는 베오그라드를 떠나 3시간 30분간 비행하고 저녁 7시경에 바그다드에 착륙했다. 배터리는 바그다드에 착륙한 다음에야 돌려주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김승일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이제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를 거쳐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야 했다. 공항의 의자에 앉아 잠깐 기다리면서 김승일이 라디오에 배터리를 넣었다. 그런데 공항 여자 안내원이 환승객을 데리고 환승홀로 가서 남녀 각각 모든 휴대용 가방과 몸수색을 했다. 이때 김승일이 가지고 있던 라디오 안의 배터리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배터리를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
여안내원이 김승일의 배터리를 압수하려고 했다.
“왜 배터리를 압수하는 거요?”
김승일이 다급하게 항의했다.
“우리 바그다드공항의 규칙입니다. 승객들은 이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여자 안내원이 배터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왜 바그다드 공항만 개인 물건을 검열하고 압수하는 거요? 라디오도 들을 수 없다는 말이오?”
김승일이 배터리를 주워 라디오를 켜 보이며 항의했다. 여자 안내원은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배터리를 압수하지 않았다. 검열이 끝난 후 비행기 표를 체크하러 가는 도중 두 번째 검열을 받았다. 그때는 다행히 라디오 배터리를 압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티켓 체크를 마치고 보딩카드를 받은 후 홀에 들어가 앉아서 탑승시간을 기다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탑승 20분 전에 김승일이 라디오의 동작스위치를 고정시간인 9시간 후로 맞추었다.
김현희와 김승일은 마침내 바그다드발 김포행 대한항공 여객기인 KAL858기에 탑승했다. 그곳에는 중동지역에서 일을 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왁자하게 떠들면서 여객기에 탑승했다.
“어서 오세요. 대한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승객들이 탑승을 마치자 승무원들이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김현희는 악센트가 달랐으나 낯익은 한국말을 듣자 반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있었고 KAL858편에 탄 승객들은 비행기와 함께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