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의 금메달…마라톤 이봉주 3초 차로 놓치고 유도 장은경 3분 천하 해프닝
▲ 1996년 애틀랜타에서 각각 은메달을 획득한 마라톤 이봉주. |
▲ 1976년 몬트리올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유도 장은경. 연합뉴스 |
“애틀랜타의 3초가 없었다면 마흔 살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뛰지 못했을 것이다.”
전자는 1956년 멜버른올림픽 복싱 은메달리스트 송순천 옹(78)이 2004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후자는 16년 만에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는 ‘국민마라토너’ 이봉주가 최근 <일요신문>에 밝힌 내용이다. 삼성이 일찌감치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1992년 광고)”고 말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2등의 존재감은 약하다. 그러나 때로는 1등보다 더 감동적이고, 더 오래 기억되는 2등도 있는 법이다. 런던 올림픽(7월 27일~8월 12일)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일요신문>이 ‘올림픽 은메달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역대 하계올림픽에서 한국이 딴 메달은 총 215개다. 이 중 금·은·동의 비율은 68:78:73이다. 한국은 금메달의 환호보다는 아쉬움이 10번은 더 많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건국 후 첫 금메달을 딴 양정모(59·레슬링)는 기억해도 송순천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송순천의 은메달은 정말이지 금메달 못지않은 은메달로 영원히 기억될 만하다.
송순천은 1956년 겨울(맞다. 북반구는 겨울이었다) 멜버른 올림픽 복싱 밴텀급 결승전에 올랐다. 올림픽에서 한국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결승(은메달 확보)에 오른 것이다. 상대는 동서독단일팀의 볼프강 베렌트. 송순천은 3라운드 내내 우세를 지켰다. 종료 1분여를 남기고 베렌트가 사력을 다해 반격했으나 이렇다 할 포인트는 없었다. 관중들은 “코리아!”를 연호했고, 누구도 송순천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국기게양대에서도 태극기를 맨 윗자리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베렌트의 판정승. 동서독단일팀이었지만 베렌트는 동독 소속이었다. 그리고 이 경기의 심판 4명 중 3명이 공산국가 출신이었다. 속이 보이는 편파판정이었다.
이후 은메달은 양정모의 금메달까지 5개나 더 나왔다. 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노메달 수모를 겪은 우리나라는 64년 도쿄에서 장창선(레슬링), 정신조(복싱)가 은메달을 땄다. 68년 멕시코에서는 복싱의 지용주가 다시 은메달을 추가했다. 72년 뮌헨에서 오승립이 은메달을 따며 유도를 은메달 종목에 추가했다. 당시만 해도 은메달이 최고 성적이었던 까닭에 선수들은 귀국 후 카퍼레이드를 했다.
76년 몬트리올에서도 양정모에 앞서 유도의 장은경이 은메달을 하나 추가했다. 유도 라이트급 결승전에서 쿠바의 헥토르 로드리게즈에게 유효 1개차로 패했다. 그런데 경기가 치열했던 까닭에 당시 주심은 잠깐 착각을 일으켜 장은경의 승리를 선언했다. 온 나라가 금메달을 염원하고 있던 시절, 경기장은 코리아 함성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딱 3분이었다. 주심의 판정이 번복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양정모의 진짜 금메달이 나온 까닭에 장은경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은메달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96년 애틀랜타 남자 마라톤에서 이봉주가 3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것은 이제 역사가 됐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1·2위 격차 3초는 지금까지도 기록이고,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다는 평가가 많다. 이봉주는 이후 3번이나 더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금메달은커녕 메달 획득에도 실패했다. 아시안게임 2연패, 두 차례 한국최고기록 수립, 올림픽보다 힘들다는 보스턴마라톤 제패 등 숱한 업적을 이뤘지만 올림픽만은 비켜갔다.
2000년 시드니에서도 기억할 만한 은메달이 이어졌다. 체급을 바꿔 연속으로 금메달을 딴 심권호의 환호는 기억하지만, 당시 레코로만형 58㎏이하급의 세계 최강자로 심권호보다 더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김인섭(39)의 은메달은 잊힌 지 오래다. 김인섭은 올림픽 직전 세계 선수권을 제패했고, 라이벌들과의 실력 차도 제법 컸다. 그런데 김인섭은 예선 라운드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뼈를 깎는 4년간의 노력이 아까워 스스로도 포기하지 못하고 결승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정신력도 한계가 있는 법. 부상 때문에 상대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허용한 끝에 테크니컬 폴로 무기력하게 패했다. 결승전 내내 고통스러워하고, 경기 후 눈물을 펑펑 흘리던 김인섭의 모습에 많은 국민도 눈시울을 적셨다.
남자 체조 이주형도 평행봉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손에 쥔 듯했지만 바로 다음 세계랭킹 1위 리샤오펑(중국) 역시 퍼펙트한 연기를 선보여 아깝게 2등에 그쳤다. 또 열악한 환경에서 기적을 노려온 남자 하키도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계 최강 네덜란드에게 아쉽게 패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의 올림픽 은메달 하이라이트는 2004년 아테네에서 나왔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더 유명해진 여자 핸드볼이 그 주인공이다. 너무 잘 알려진 까닭에 세계 최강인 덴마크를 상대로 임오경 등이 노장투혼을 발휘해 연장과 재연장, 승부던지기까지 128분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선수들은 물론 한반도를 감동시켰고, 외국 언론도 극찬했다.
올림픽의 고향 아테네에서는 심판의 오심으로 체조의 김대은과 양태영이 금메달 대신 은,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남자 역도 69㎏급의 이배영은 마지막 금메달에 도전하는 시기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실패했지만 백만 불짜리 미소로 은메달의 의미를 높였다.
▲ 왕기춘. 연합뉴스 |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