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백곰” 놀리자 체중조절
▲ 1988년 1월 15일 안기부에서 김현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KAL기가 폭파되고 나면 탑승자 중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사람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지만 실은 아부다비공항에서 암만-로마로 가서 비엔나를 거쳐 평양으로 갈 계획으로 그곳 비행기 표를 구입해 두었어요. 그런데 아부다비공항에 내리자마자 공항직원이 우리에게 직접 체크인을 해주겠다면서 비행기 표를 달라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우리가 타고 온 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 비행기 표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바레인까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레인에서 바로 로마로 갈 수 없었나?”
“바레인에서 로마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려 했지만 첫날은 공휴일이었고 또 다음 날은 비행기 표가 없다고 하여 이틀을 바레인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바레인 공항에서 발각되어 우리는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둔 독약 앰플을 깨물었어요.”
김현희가 진술했다. 그들은 우연하게 바레인에서 발이 묶인 것이다.
“독약 앰플은 언제부터 갖고 있었어?”
“그것은 이번 임무를 준비하고 떠나기 일주일 전 최 지도원이 최악의 경우 비밀 보장을 위해 가지고 있으라고 하면서 준 것이에요.”
“담뱃갑이라고 했는데 무슨 담뱃갑이야?”
“말보로 담뱃갑에서 한 개비 필터 속에 앰플을 넣고 필터 위에 작은 담배가루를 묻혀 표시해 두었어요. 그런데 정말로 내가 그것을 깨물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깨문 것이 맞아? 어떻게 김승일은 죽고 너는 살 수 있었지? 혹시 무서워서 안 깨문 거 아냐?”
“나는 분명 깨물었습니다. 내가 안 죽은 걸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나도 왜 안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현희가 발끈하고 화를 냈다. 그녀는 어떤 일을 수행할 때는 인내심도 있었지만 누가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하면 순간적으로 발끈하는 성격이었다. 북한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공작원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분명 자존심과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을 텐데 남한에서 비록 폭파범으로 잡혀있다 할지라도 쉽게 그것을 누그러뜨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에 보고하지는 않았어?”
“김승일이 빈의 북한대사관에 전화로 대한항공 항공권과 복귀하기 위한 항공권을 구입했다는 내용의 전화보고를 했어요.”
“전화번호는 어떻게 외웠어?”
수사관의 심문에 김현희는 소지한 수첩에 금전출납내역을 적은 것처럼 위장한 숫자와 점자 암호로 오스트리아 빈과 유고의 베오그라드 주재 북한 대사관의 전화번호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85년도에 검거한 간첩 신광수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암호였다.
김현희에 대한 심문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과 세계 각국의 언론이 그녀의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만간 기자회견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심문을 서둘러야 했다. 게다가 그녀의 건강도 중요했다. 기자회견을 할 때 그녀의 건강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김현희의 건강 체크는 안기부 의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했다. 공작원 훈련을 받았고 젊었기 때문에 그녀의 건강은 비교적 양호했다. 그녀가 자백을 하지 않았을 때는 음식을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가냘팠다. 그러나 자백을 한 뒤에는 음식을 잘 먹고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하루는 몸무게를 재어보니 60㎏이 넘었다.
“어떻게 젊은 여자 몸무게가 60㎏이 넘을 수 있냐? 백두산에서 온 백곰 같구나.”
하루는 수사관들이 웃으면서 김현희에게 농담을 했다. 그러자 김현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김현희는 그날 이후부터는 밥을 적게 먹으면서 체중 조절을 하기 시작했다.
김현희는 강인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자였다.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조사실에서 몇 시간씩 앉아서 심문받고 하던 말 다시 해보라고 하고 써보라고 해도 지친 기색 없이 응했다. 또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암기력이었다. 북한에서의 교육이 김일성 교시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외워야 하는 등 암기식 교육이기에 그러하기도 했겠지만 후에 김현희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어 간증을 다니면서도 성경말씀이나 간증 원고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외우는 걸 보면서 새삼 그녀의 암기력에 감탄했다.
“성이 김 씨라고 그랬지? 어디 김 씨야?”
하루는 수사관들이 김현희에게 물었다.
“어디 김 씨요?”
“본관이 어디냐고?”
“본관이 뭐예요?”
수사관들은 본관을 모르는 김현희에게 놀랐다. 수사관들이 본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김일성은 경주 김씨라고 하자 자신도 경주 김씨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현희로부터 출생 및 성장과정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그녀는 어려서부터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고, 중신중학교 1학년인 72년 11월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남북조절위 2차 회담 때 남한 측 대표들이 헬기를 타고 비행장에서 내릴 때 화동으로 선발되어 남한 대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KAL 858기 폭파사건’ 중간조사에서 발표한 문제의 화동 사진 중 일부. 하기와라 료가 ‘서울과 평양’에 공개한 사진으로 3번이 김현희라 밝혔다. 연합뉴스 |
김현희의 진술이 나오자 수사관들은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72년 11월에 평양에 간 사람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대표단 단장이었던 장기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장기영은 부총리를 역임했고 한국일보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수사관들은 당시 동행 취재한 언론사를 통해 사진을 입수했다.
“이 아이가 너야?”
수사관들이 장기영 씨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화동 사진을 보여주면서 김현희에게 물었다.
“워낙 어렸을 때라서 잘 기억을 못하지만 맞는 것 같아요.”
김현희가 대답했다. 그리하여 문제의 사진이 유출되었다. 북한에서는 사진을 찍고 인화하기가 쉽지 않아 사진 찍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어려서의 자기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사가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하다보니 생긴 착오였다.
“장기영 씨에게 꽃다발을 걸어 준 화동은 김현희가 아니다.”
그 후 북한에서 반박했다.
“내가 진짜 사진 속 인물입네다. 남조선에서 KAL기 사건도 이번 사진도 조작한 것입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김현희입니까?”
정희선이라는 여자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KAL기 폭파사건이 남한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도 화동 사건을 가지고 KAL기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그 후 일본의 <요미우리위클리>에서 당시 찍은 다른 화동 사진을 제시하며 그중 한 아이를 지목하여 김현희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당시 안기부에서 입수하지 못했던 사진이었다. 우리가 봐도 귀나 얼굴 생김새가 훨씬 김현희와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가 김현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입가의 점이었다. 김현희가 우리와 함께 북한의 생활을 이야기 하던 중 자기가 원래는 입가에 기미(점)가 있었는데 동네에 사는 관상을 좀 본다는 할머니가 자기를 보고 그 점은 나쁜 점이니 빼라고 하여 뺀 적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나중의 김현희 사진이 나오기 전 얘기다. 우리는 그냥 가볍게 듣고 흘려버렸었는데 후에 나온 사진에서 입가에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에 김현희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북한은 김현희의 존재를 부인했다. 김현희는 죽음으로써 북한에 충성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이 완전히 자기의 존재를 부인하자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김현희는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적극적으로 북한에 대해 비판도 하고 실상을 얘기하기도 했다.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아무리 못살아도 정말 그럴려구?”
나는 김현희에게 그렇게 말했다.
“언니는 그런 것 모르지요?”
김현희는 신이 나서 수사관들에게 북한생활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초등학생들이 학교에 갈 때는 각기 학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 학급 학생이 학교 가기 전 약속 장소를 정해놓고 아침에 일단 거기서 모여 일일이 복장검사를 한 다음 줄을 맞춰 노래를 부르며 행진한다고 했다. 한때 뉴스를 보면 실제로 학생들이 줄을 맞춰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평양 시내에서 여자들에게 바지를 못 입게 한 일도 있었다.
“누구와 함께 교육을 받은 거야?”
김현희에 대한 심문은 계속되었다.
“중앙당에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동북리 10호 초대소에서 김숙희라는 여자공작원과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와는 장장 7년 8개월간 같이 생활했습니다.”
김현희가 생각에 잠기면서 대답했다.
“김숙희는 몇 살이야?”
“나보다 한 살 아래입니다.”
“어디 출신이야?”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좌급 군관인 아버지와 식료품 상점 판매원이었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평양 경공업대학 일용학과 1학년에 다닐 때 소환되었습니다.”
“김숙희가 본명인가?”
“아닙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김순애라고 했습니다.”
안기부에서는 김현희와 함께 교육을 받은 공작원이나 그들을 훈련시킨 교관들까지 모두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심문은 계속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국으로 압송된 지 한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회견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기자회견을 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