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다 떠나고 나니 제사 형식을 우리가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제사를, 무엇보다도 제사상을 매우 중시했다. 마음이 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니 엄마 살아생전에는 엄마의 전통적인 상차림을 존중했지만 나의 제사는 달라졌다. 나는 제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제사상에 영정 사진으로 썼던 사진 앞에 촛불 한 대, 향 한 대만을 올린다. 그 대신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관조하는 일이 나의 제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들이 모여 제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면서 우리는 각자 지내기로 했다. 형제와 자매, 게다가 그들의 배우자와 아이들까지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제사는 평소에 만나기 힘든 원가족을 만나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을 나누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시간을 내서 평소 자연스럽게 만나면 된다.
‘제사’라는 목적을 놓고 모이면 형식을 놓고 갑론을박, 억지로 참석한 사람끼리 눈치보기 등 신경이 분산되어 오롯한 제사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 살기도 바쁜데 본 적도 없는 사람, 세상을 떠난 사람까지 왜 챙겨야 하느냐고 되물으면 어쩔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
이번에 대법원에서 반가운 판결이 나왔다. 제사 주재자는 협의에 의해 정하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최근친의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로 우선한다는 것이다. 장남이나 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우선하는 것은 양성평등을 정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이유다.
우리 어머니는 2020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좋아했던 이모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이모하고는 막역한 사이였지만 그날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모의 면모에 놀란 일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영정 사진이 우리 집에 있는 것을 본 이모가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니, 장남한테 가야지!”
“왜요, 이모?”
나는 왜 똑똑한 사촌언니가 늘 남자에 대해 기가 죽어있는지, 은연중에 아들딸을 차별하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우리 이모는 인격자다. 늘 기도하는 이모, 늘 주변을 축복하는 이모, 그래서 어머니에게 어머니도 이모처럼 만나는 사람을 위해 무조건 기도해주고 축복해주면 좋지 않을까라고 충고했다가 어머니의 질시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영정 사진의 자리를 두고 내게 한 이모의 충고는 충격이었다. 나는 안다. “내 사진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는 노래의 의미를. 당연히 남동생이건 여동생이건 동생들이 부모의 영정 사진을 모시고 싶다고 하면 나는 기꺼이 내줄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영정 사진의 자리가 남동생의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일은 내가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나는 맏딸이다. 내 밑에 여동생이 있고, 그 밑에 두 남동생이 있다. 큰이모의 행태를 보면 그 옛날 남성 중심적인 사고 패턴이 어떻게 확산되고 전해졌는지가 보이는데 그런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사회를 살아내면서도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마음에서 3년 상을 치렀다. 왜 3년인지 알 것 같았다. 3년은 그리움이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고 그리운 것들을 그리운 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눈물이 맺히지만 그러나 이제 문득문득 흐르는 그리움의 눈물이 힘겹지 않다. 그리고 안다. 이제 감미로운 목숨까지 버리고 떠날 다음 차례가 나라는 사실을. 평소 죽음을 준비하며 하나하나 내려놓은 연습을 해야 삶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잘 나이 들고 싶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