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우려 해소돼도 통합 항공사 경쟁력 타격 불가피…대한항공 “슬롯 반납 문제 향후 충분히 극복 가능”
#슬롯 반납, 어디까지?
지난 5월 17일(현지시간) EU 집행위원회는 대한항공에 보낸 합병 관련 중간 심사보고서를 통해 “한국과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간 4개 노선에서 승객 운송 서비스 경쟁이 위축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유럽 전역과 한국 사이의 화물 운송 서비스 경쟁이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며 지적했다.
EU는 올해 2월부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2단계 기업결합심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항공은 오는 6월까지 경쟁제한 우려 해소 방안을 담은 시정조치 방법을 제출해야 한다. EU는 오는 8월 최종 합병 승인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EU 측은 “대한항공은 EU 집행위원회의 파일을 참조해 구두 청문회를 요청할 수 있다”면서 “합병 당사자들은 위원회가 사전에 확인한 모든 경쟁적 우려를 해소하는 해결책을 제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도 진행되는 심사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최근 미국 법무부(DOJ) 차관은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과 강석훈 KDB산업은행 회장, 원유석 아시아나항공 대표 등을 면담했다. 합병이 독점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경쟁제한 관련 대한항공의 논리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미국 법무부가 반독점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3월 두 항공사의 합병 심사절차를 ‘간편’에서 ‘심화’로 올리고 대한항공에 심층 자료를 요청했다. 같은 해 11월 미국 법무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며 심사 기간을 연장했다.
대한항공도 경쟁 제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선택 가능한 방안을 찾는 모습이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에 따르면, 에어프레미아는 대한항공 요청으로 미국에 아시아나항공을 대체할 신규진입항공사(Remedy Taker)가 될 수 있는 이유 등을 담은 제안서를 미국 법무부에 제출했다. 해당 자료에는 에어프레미아의 미국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취항 목표 시기 등의 내용이 담겼다. 로스앤젤레스(LA) 노선을 운영해왔던 에어프레미아는 5월 22일 뉴욕에 신규 취항하며 미국 노선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통합할 경우 서울~바르셀로나, 서울~프랑크푸르트, 서울~로마, 서울~파리, 서울~이스탄불 노선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각각 100%, 86.4%, 87.2%, 75.5%, 68.7%다. 북미 지역에서도 서울~뉴욕(100%), 서울~로스앤젤레스(99.7%), 서울~시애틀(99.4%), 서울~호놀룰루(78.3%), 서울~샌프란시스코(79.4%) 등 점유율이 높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슬롯을 반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인바운드(국내로 들어오는 여행)보다 아웃바운드(해외로 나가는 여행)가 많다. 유럽과 미국 노선의 경우 수요와 공급에 맞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점유율이 높게 형성된 측면이 있다”며 “해외 당국이 향후 자국 항공사가 슬롯을 확보할지 여부는 모르지만 일단 알짜 슬롯을 미리 확보해놓으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윤철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해외 경쟁당국의 견제는 곧 외항사의 견제다. 해외 경쟁당국들은 협상 과정에서 슬롯을 더 얻어내려고 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공정위가 합병 승인을 내주며 기준을 높게 설정한 탓에 외국 경쟁당국들이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정윤식 가톨릭관동대 항공운항학과 교수는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할 수 있는 상황에서 치명타를 입힐 만큼 슬롯 반납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EU든 미국이든 아시아나항공이 가진 슬롯 전체를 반납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항공업계 다른 관계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아시아나항공급 회사를 당장 갖추는 건 물리적으로 사실 불가능하다. 미국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인다”라고 내다봤다.
#통합 항공사 경쟁력 저하 우려
대한항공이 이제 와서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스스로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대한항공은 2020년 11월부터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추진했다. 합병 자문료로 대한항공은 1000억 원 이상을 지출했다. 진전도 많이 됐다. 대한항공은 한국을 비롯해 터키, 대만, 베트남 등 필수신고국가에서 기업결합심사 승인을 얻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호주 등 임의신고국가에서도 승인을 받았다. 미국, EU, 일본 등 필수신고국의 승인만 남은 상태다.
다만 대한항공 안팎으로는 통합 항공사의 경쟁력을 둘러싸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미 대한항공은 합병 승인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다수의 슬롯 이전을 약속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보유한 영국 런던 히스로공항 17개 슬롯 중 7개를 반납하기로 했다. 중국에서는 한국과 중국 경쟁당국이 독점 우려를 표한 9개 노선에 신규 진입하려는 항공사가 있을 경우 슬롯을 이전키로 했다.
이윤철 교수는 “슬롯을 많이 넘겨줄 경우 공급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익성에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슬롯 반납은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10개 중 5개를 넘겼다고 해서 수익성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다만 양승윤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추후 합병을 통해 유연하게 스케줄을 짤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실만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내부에서는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새어나온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다고 밝혔지만, 슬롯 반납으로 수익성이 악화할 경우 인력이 과잉돼 구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대한항공 관계자는 “아직 미국 법무부에서 합병 불허를 통보받은 바는 없다”며 “협상 단계에서는 모든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서로 얘기가 오갈 수 있다. 슬롯 반납 우려와 관련해선 향후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양사의 기업결합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고 있다. 합병 무산 시 플랜B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드리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