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바둑계 ‘세대교체 태풍’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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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둑계의 ‘다카르 랠리’ 제14회 농심배 대표 선발전 예선 1회전이 지난 7월 4일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 ||
선발전 첫 날의 사건 중에서 머리에 올라간 뉴스는 이세돌 9단의 탈락. 이세돌을 격침시킨 주인공은 지난해 여름 프로에 들어온 김현찬 초단(24). 요즘 스물세 살 입단이면 데뷔가 늦은 편이고, 신예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지만,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청년이다. 기량이 탄탄해 앞으로 꾸준히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김현찬이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이세돌이 졌다는 것.
그나저나 홈런 타자 이세돌 9단이 올해 들어서는 낌새가 이상하다. 아직까지 큰 것 한 방이 없다. 없을뿐더러 국내 대회에서도 그렇고 특히 국제대회에서 한·중의 한참 어린 후배들에게 자꾸 지고 있다.
3월에는 제7회 잉창치배에서 16세 소년 판팅위에게 졌고, 6월에는 제17회 LG배에서 스위에(21)에게 패했다. 후지쓰배가 없어진 지금 LG배, 삼성화재배, BC카드배, 잉창치배, 춘란배의 5개 세계 타이틀 중에서 삼성화재배는 지난해 말 원성진이, BC카드배는 얼마 전에 백홍석이 차지했으니 다음을 기약해야 하고 진행 중인 LG배와 잉창치배에서는 탈락한 것. 또 춘란배의 전기 우승자이기는 하나 춘란배는 격년제로, 2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여서 역시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국내 1위이자 세계 1위로 통했건만 이제 잘못하면 국제무대에서는 ‘무관의 제왕’이 될 처지다. 국내 랭킹 1위에서는 지난달에 이미 밀려나고 말았다. 28개월 동안이나 요지부동으로 지키면서 다달이 재위 기간을 경신하고 있던 자리였는데, 그걸 박정환 9단(19)에게 양보한 것. 6월 말에는 제8회 물가정보배에서 김지석과 윤준상에게 거푸 고배를 들어 16강에 머물렀다. 본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성적표다.
이창호 9단이 한 발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이세돌 9단이 주춤거리고, 중국에서도 구리 콩지에가 자주 밀리고 있자, 세계 바둑계의 평준화 혹은 세대교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고 세계 바둑의 춘추전국시대 도래라는 얘기도 들린다.
한국의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원성진 박영훈 강동윤 백홍석 김지석에 며칠 전 타이젬의 온라인 세계대회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한, 이세돌에서 박정환으로 이어지는 천재 계보의 중간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천재인데도 실력에 비해 덜 알려진 홍성지 8단(25)까지, 그리고 중국의 구리 콩지에 박문요 씨에허 장웨이지에 탄샤오 당이페이 리엔샤오 리캉 등에 위에서 말한 판팅위 스위에까지 20명쯤의 한·중 고수들이 각축하는 마당이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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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예선전에서 이세돌 9단(왼쪽)이 김현찬 초단에 패하면서 세대교체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 ||
춘추전국, 군웅할거,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초·중반이 그랬었다. 조남철 9단에 이어 김인 9단이 독주하던 시절이었는데, 서봉수가 혜성처럼 등장했고 일본에서 유학하던 하찬석 조훈현이 돌아왔다. 또 김인 세대였던 윤기현과 정창현이 힘을 냈고, 서봉수의 뒤를 이어 김희중이 나타나 이들이 타이틀을 분할했다. 그런 시기가, 70년대 후반 조훈현이 타이틀을 쓸어가기 시작하기 전까지, 5년쯤 지속되었다.
일본도 비슷했다. 린하이펑이 사카다 시대를 마감시키면서 몇 년 정상에 군림하던 중에 70년대 들면서 오다케 히데오, 이시다 요시오, 가토 마사오, 다케미야 마사키에 조치훈과 고바야시 고이치까지 기타니 도장 문하생들이 쏟아져 나와 백가쟁명을 연출한 것. 그를 평정한 것이 조치훈이었고, 조치훈의 바통을 넘겨받은 사람이 고바야시였다.
일본은 지금도 장쉬를 비롯해 야마시타 게이고, 다카오 신지, 하네 나오키, 이야마 유타 등이 타이틀을 나누어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여서, 일본 국내에서는 모르지만, 국제무대에 긴장감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가장 어린 이야마 유타가 뭔가 획기적인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 주지 않을까 했는데, 치고 올라오는 기색이 없다.
그나저나 이세돌이 계속 이런 상태로 머문다면 걱정이다. 강동윤과 김지석의 ‘한 번 더’ 분발이 아쉬운 상황에서 박정환 혼자 중국 ‘90년 후’들의 인해전술을 감당하기는 벅차다.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은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있고 백홍석 이영구 허영호는 아직 연결타가 없으니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지난 번에 소개했던 나현이 박정환의 뒤를 받쳐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말마따나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1~2년 사이에 입단한 신예 중에서는 이동훈과 변상일이 주목의 대상이다. 이동훈 열네 살, 변상일은 열다섯 살. 나이에서 일단 가산점을 받는다.
한·중 바둑의 오늘을 진단하며 “우리 ‘입단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우리의 고질적 병폐 중의 병폐인 대학입시처럼 어린 기재들이 창의성 계발보다는 입단만을 위한 틀에 박힌 교육, 입단 위주의 주입식 훈련만 받는 게 아니냐는 것.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아무튼 이들을 합해도 숫자로는 중국에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일. 숫자로야 중국을 어찌 당하겠는가. 하긴 우리 바둑이 세계 최강을 구가하게 된 것이 숫자 덕분은 아니었으니까.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잉창치배를 제패했고, 이창호는 늘 최후의 관문을 지켰다. 이창호를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정상에 오를 수 없었다. 중국이 아무리 숫자로 밀고와도 우리는 언제나 한두 사람의 걸출한 천재가 그를 막아냈다. 한국 바둑의 운명이자 축복이었다.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이세돌 9단이 빨리 심기일전해 주기를 바란다. 혹시 몇 년 전처럼 뭔가 ‘이건 아닌데…’라는 게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 건지.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