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기 분석으로 한국 재벌 쥐락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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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0일 서울 여의도 증권사 객장에서 전광판을 지켜보던 주식 투자자들은 오후장이 시작되자마자 맥없이 추락하는 주가를 보면서 아연 실색했다.
전일 급락한 탓인지 이날 주가는 오전장 잠시 반등세를 보이다가 갑자기 급락세로 돌변하면서 종합주가지수가 20포인트 넘게 떨어졌다. 이날 주가가 반등세에서 급락으로 돌변한 것은 한 외국계 증권사의 애널리스트가 내놓은 2페이지 분량의 삼성전자에 대한 분석보고서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낸 곳은 UBS 워버그증권사. 이 증권사는 이날 ‘삼성전자에 대한 분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의 적정 투자등급을 ‘보유’”로 평가했다.
워버그증권사는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증권사로, 지난 94년 4월 위탁매매업을 목적으로 서울지점을 설립하면서 국내 자본시장에 발을 디뎠다. 이 증권사는 현재 증권 위탁 매매업 외에도 자기매매, 기업 인수업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이 전해지자 삼성전자의 주식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 주가는 이날 하루동안 3만원이 넘는 7.8%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4조원 가량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만 것.
이날 주가하락은 보고서를 먼저 접한 외국계 창구로부터 물량이 쏟아진데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일반 투자자들까지 가세해 거의 투매현상을 보였다. 삼성전자의 주식값이 급락하자 삼성 계열사 주식들까지 덩달아 추락하면서 여의도 증권가를 바짝 긴장시켰다.
물론 이날 주가 폭락은 지난해 11월 이후 6개월 가까이 급등세를 이어온 주식시장의 조정 중 하나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날 벌어진 상황은 워버그증권이 내놓은 삼성전자 투자등급 하향조치가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되자 여의도 증권가가 들끓기 시작했다. 워버그가 왜 그같은 보고서를 갑자기 내놓았느냐, 워버그 창구를 통해 쏟아진 삼성전자 물량의 주체는 누구냐, 투자등급 하향의 배후가 무엇이냐는 등의 의혹들이 뒤따랐다.
결국 이 문제는 해당기업인 삼성전자의 제소, 금융감독기관인 금감원의 조사착수로 이어지면서 증권가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이번 사태를 두고 제기된 첫째 의혹은 워버그의 작전설. 이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워버그가 삼성전자의 투자등급을 ‘보유’로 두 단계 내리기 불과 3일 전에 ‘강력 매수(strong buy)’라는 보고서를 낸 때문이다.
불과 3일 전까지도 ‘삼성전자 주식을 사라’고 외쳐대던 워버그가 돌연 매도의견이나 마찬가지인 ‘보유’로 투자의견을 바꾼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국내 증권 관계자들은 “삼성전자에 대한 특별한 의도(조작 등)를 갖고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면 한 기업에 대한 의견을 사흘 만에 천당과 지옥으로 바꿔 내놓는 것은 소도 웃을 일”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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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들의 회사에 대해 소개해 놓은 UBS워버그증권 본사의 홈페이지. | ||
게다가 워버그의 보고서가 유포되기 하루 전 이 증권사의 창구를 통해 대량의 삼성전자 주식이 쏟아져 나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삼성전자측은 “워버그의 보고서 유통 경로 및 최근의 주식 거래에 이상이 있다”며 금감원에 보고서 유출경로 등에 대한 조사를 요청하고 나섰다.
삼성전자측은 “최근 삼성전자 주가 급락이 정상적인 주식거래의 결과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 회사가 보고서를 발간하는 시점을 전후한 주식 거래내역에 대해 정밀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증권가와 삼성전자는 ‘보고서 파문’이 일어난 지 4일 만인 지난 14일부터는 외국인들이 주식값이 떨어진 삼성전자의 주식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한 부분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이 증권사가 ‘특정 의도’를 갖고 이같은 보고서를 내 삼성전자의 주식값을 떨어뜨린 뒤, 헐값에 주식을 사들였다는 얘기.
파문이 확산되자 금감원은 증권감독국 직원 세 명을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워버그증권 서울지점에 파견, 조사에 착수했다.
금감원이 조사하는 핵심은 ▲삼성전자 보고서를 사전에 유출했는지 여부 ▲이 증권사가 보고서를 공개하기 전 자기매매를 했느냐 여부 등 크게 두 가지.
현행 증권법에 따르면 일반 투자자들과의 형평성을 위해 증권사는 기업에 대한 보고서를 특정 고객에게 미리 유출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또 기업의 주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위탁매매 외에 자기매매는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가지 사항을 쉽게 찾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 금감원 관계자는 “보고서 유출 경로 등에 대해 조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히 파악된 것은 없다”고 전했다.
자기매매의 경우는 서울지점은 외국계 증권사의 한 지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확한 물량 규모 파악이 어렵고, 본사에 관한 검사권은 국내 금융감독기관인 금감원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지난 9일부터 이 증권사의 창구를 통해 물량을 쏟아낸 것으로 드러나 보고서의 사전 유출과 자기매매에 관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또 투자의견을 맘대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도덕성’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법적’으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대다수 주식 투자자들은 “한 외국계 증권사의 보고서가 국내 증권시장의 대표주인 삼성전자 주가를 폭락시키고, 주식시장 전체를 뒤흔든 것은 한국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말해주는 단면”이라고 개탄했다.
정혜연 기자 ch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