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하기엔 ‘상식’을 넘어섰네
▲ 지난 10일 박근혜 전 위원장이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선출마선언식을 가진 후 기자회견을 통해 선언문의 취지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
지난 7월 10일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서울 영등포 타임 스퀘어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하는 동안 박 전 위원장 사무실에 팩스 한 장이 도착했다. 시민운동단체인 ‘내가 꿈꾸는 나라’에서 보낸 ‘슬로건 사용 중지 요청’ 공문이었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민주통합당 김기식 의원은 공문을 보내기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작명을 했던 저로서 당혹스럽네요. (중략) 박근혜 의원이 거의 베끼기 수준으로 나오니 참”이라며 불만을 표출했다.
‘내가 꿈꾸는 나라’ 민만기 집행위원장은 “‘왜 우리 이름이 박 전 위원장의 슬로건으로 사용됐냐’는 회원들의 항의 전화에 매우 곤혹스럽다. 현역 의원(민주통합당 김기식 남윤인순 홍종학 의원 등이 이 단체에 소속돼 있음)까지 배출한 시민단체를 박 캠프 측에서 몰랐을 리 없다. 설사 몰랐다 하더라도 비슷한 명칭을 다른 곳에서 쓰고 있는지 먼저 확인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박근혜 캠프는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캠프 관계자는 “박 의원실로부터 해당 공문을 전달받은 사실이 없다”면서 “설사 공문을 받았다고 해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나’, ‘꿈’, ‘나라’가 들어간 슬로건은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단어들인데 그때마다 쓰지 말라고 한다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야당 성향의 단체가 정치 공세를 퍼붓는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박 캠프는 같은 당의 대선 캠프로부터 원성을 듣고 있기도 하다. 새누리당의 또 다른 대선 경선 후보인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캠프에서 박근혜 캠프 엠블럼이 표절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두 로고는 원 안에 후보의 이름을 초성으로 새겨 넣은 점이 흡사하다. 임태희 캠프의 송 아무개 씨는 “우리 엠블럼은 자원 봉사를 하는 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져 지난 5월부터 명함과 우편물 등에 사용되고 있었다”라며 “표절인지 여부는 저쪽(박근혜 캠프)에서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당초 임태희 캠프 측은 같은 당 후보끼리 네거티브 공방은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박근혜 캠프에서 일언반구조차 없자 법적대응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설상가상 경선 불참을 선언한 이재오 의원 측마저 박 캠프의 공식 명칭인 ‘국민행복캠프’에 관해 “‘국민행복’은 이재오 캠프의 공식 명칭이었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엠블럼 표절 시비에 관해 한 디자인 평론가는 “초성을 적어 넣은 방식만으로 표절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개념적인 영단어 몇 개를 모은 뒤 맨 앞의 알파벳을 따서 상표명을 만드는 방식은 예전부터 사용되어 왔고 두 캠프의 로고는 이 방식을 한글로 변용한 것일 뿐이다. 캠프 측에서 이런 개념까지 알고 만들었을 리 있겠느냐. 디자인 감수성이 낮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꼬집었다.
캠프 슬로건과 엠블럼은 사소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책 방향과 공약의 ‘짜깁기’ 논란은 한층 비켜가기 어려운 문제다. 현재 박근혜 캠프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놓고 민주통합당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민주통합당은 박근혜 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헌법 119조 제2항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의 한 보좌관 역시 “87년 헌법 개정 당시 기사를 검색해 보라. 김종인 위원장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제 와서 경제민주화의 기틀을 세운 사람으로 행세하고 박 캠프에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박 전 위원장이 현 정부에서 추진 중인 정책을 제목만 바꿔 자신의 공약으로 사용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박 전 위원장은 공식 출마 선언 이후 첫 방문지인 대전에서 “앞으로의 정부는 일방향의 정부 1.0을 넘어 쌍방향의 정부 2.0을 구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별 맞춤행복을 지향하는 정부 3.0 시대를 달성해야 한다”며 자신의 첫 공약인 ‘정부3.0’을 발표했는데 이는 현 정부에서 실행하고 있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민주통합당 박용진 대변인은 “박 전 위원장의 공약은 지난 2009년 12월 발표된 ‘클라우드 컴퓨팅 활성화 종합계획’을 통해 방송통신위원회, 행정안전부, 지식경제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을 재탕하고 베끼기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앞서의 의원 역시 “이 정책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실행시켰던 인물이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었던 최경환 의원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의 아이디어는 어디에도 없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여야와 시민단체, 정부를 가리지 않고 표절 시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박근혜 캠프 측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다. 박 캠프 공보단장을 맡고 있는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모든 논란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라며 “정부3.0 공약은 웹2.0 자본주의4.0 등 이미 널리 공유되고 있는 개념이다. 엠블럼의 경우에도 미국 ABC 방송국 로고나 우송대학교 로고를 한 번 보라. 이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게 된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박 캠프 측 해명이 차기 집권이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의 해명치고는 궁색하고 무책임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미 다른 정당이나 정부기관 등에서 쓰이고 있는 ‘트레이드마크’들을 버젓이 사용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 역시 1등의 오만함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전북대의 한 교수는 이에 대해 “현재까지 박근혜 캠프에서 보여주는 일관성이란 불통과 표절 이미지다. 어느 시점에서는 유권자들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