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존 워드, 진범으로 케냐 전 대통령 아들 지목…증언 쏟아졌지만 물증 없어 법정 못 세우고 세상 떠나
생전에 이렇게 다짐했던 영국의 존 워드(89)가 얼마 전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35년 전 아프리카 케냐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딸의 곁으로 떠난 것이다. 그가 생전에 케냐를 방문한 횟수는 100번이 넘었으며, 쏟아부은 돈은 200만 파운드(약 32억 원)에 달했다. 사고사로 종결지은 케냐 정부와 영국 정부, 런던 경찰청, 영국비밀정보국(MI6)에 맞서 진실 투쟁을 벌였던 그는 줄곧 딸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만 포기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단 하루도 딸을 마음속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아내인 재닛도 그보다 2주 먼저 눈을 감으면서 이제 부모의 유지는 두 아들이 이어받게 됐다. 형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사건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다큐멘터리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과연 그때 케냐의 밀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때는 1988년 9월 5일. 아마추어 야생동물 사진작가인 줄리와 친구인 호주 출신의 글렌 번즈 박사가 스즈키 지프를 타고 마사이 마라 국립보호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7개월간 케냐에 머물면서 야생동물을 촬영한 줄리는 일주일 후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당시 나이는 28세였다.
마사이 마라 국립보호구는 케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생동물공원으로, 수도인 나이로비에서 약 27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주도 면적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파리다. 하지만 사파리를 향해 한참 달리던 중 그만 지프가 고장이 나면서 줄리와 번즈는 그곳에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번즈는 그 길로 나이로비로 돌아갔고, 줄리는 홀로 남아 마라 세레나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6일, 차량을 수리한 후 캠핑 장비를 고치기 위해 인근의 샌드리버 캠프로 향했다.
일을 마친 후에는 다시 지프를 몰고 길을 떠났으며, 이것이 줄리가 살아있는 채 목격된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주일 동안 연락이 끊긴 딸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워드 부부는 즉시 케냐로 향했다.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에 비행기 한 대를 임대해 딸이 실종된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수색을 벌였다. 이윽고 강 옆 도랑에 쳐박힌 스즈키 지프가 발견됐지만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발 딸이 살아있기만을 바랐던 워드의 희망은 곧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프가 발견된 곳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불에 탄 채 토막 난 시신 일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모닥불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시신의 일부는 턱과 왼쪽 아래 다리였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이 유골의 DNA를 조사한 결과 줄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케냐 경찰이 처음 제시한 추론은 사고사였다. 요컨대 숲에서 길을 잃은 줄리가 사자 혹은 하이에나에게 잡아 먹혔고 번개에 맞은 사체가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드는 이를 믿지 않았다. 딸이 누군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색 작업을 시작했다. 딸의 소지품이나 범행에 사용된 도구를 찾기 위해 일대를 샅샅이 뒤졌고, 그 결과 인근에서 딸의 머리카락과 카메라 배터리를 발견했다.
영국의 저명한 병리학자도 워드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토막 난 뼈의 단면을 조사한 결과 짐승에게 잡아먹혀서 찢긴 흔적이 아니라, 칼날에 의해 절단된 후 휘발유에 흠뻑 젖은 채 불에 탄 흔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는 케냐 경찰의 주장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추론이다”라고 일축했다.
얼마 후 결정적으로 범인 가운데 한 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DNA가 현장 인근에서 발견되자 케냐 경찰 역시 뒤늦게 워드의 주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 후 무려 12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렇다고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줄리를 살해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범인을 잡아 법정에 세우길 바랐던 워드는 “내 딸은 살해당했고, 시신은 토막이 났으며, 불에 탄 채 사자에게 던져졌다”면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건을 종결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딸을 죽인 살인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그만둘 수 없었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경찰 조사 결과 처음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은 주니어 레인저 두 명이었다. 경찰은 그들이 숲에서 만난 줄리를 납치해 6일간 감금한 상태에서 성폭행한 후 살해했으며, 시체를 토막 내 불에 태워 증거를 인멸했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섰던 이 두 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결국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 다음 용의선상에 올랐던 인물은 사건 발생 당시 공원 관리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사이먼 올레 마칼라였다. 2년간의 수사 끝에 1998년 경찰에 체포된 마칼라는 14개월 동안 구금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마칼라가 워드를 비롯한 수색대를 일부러 범행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정반대의 길로 안내했고, 수사관들에게는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한 점으로 미뤄 살인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법정에서 마칼라가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출되지 못했다. 판사는 마칼라가 시신이 있는 곳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기각했고, 결국 마칼라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줄곧 마칼라의 수상한 행적을 의심한 워드는 판결 소식을 들은 후 곧바로 재심을 청구했다. 케냐 법무장관에게 편지를 띄운 워드는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재판”이라고 항의했다. 요컨대 피고와 배심원단이 재판 과정에서 수시로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하는 식으로 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워드가 진범으로 의심하고 있던 인물은 따로 있었다. 마칼라의 배후에 더 거물급인 누군가 있다고 생각한 워드가 지목한 인물은 바로 대니얼 아라프 모이 전 케냐 대통령의 아들인 조나단 모이였다. 케냐 정부와 모이 대통령이 관광 산업의 피해를 막기 위해 딸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비난한 워드는 “조나단이 범인이라는 주변인들의 증언과 증거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워드는 “어느 날 오후, 내가 키코록 산장 밖에서 교통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떤 여인이 몰래 다가와서는 쪽지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고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쪽지를 펼쳐보니 집주소와 함께 다음과 같은 문장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딸을 죽인 사람은 조나단 모이다’”라고 말했다. 집주소에 적힌 대로 그 여자를 다시 찾아간 워드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마사이 마라를 비롯해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중고 옷을 파는 보따리상이라고 밝힌 그 여자는 손님들 가운데 공원 경비원 아내도 몇몇 있다고 했다. 그 여인네들은 남편들로부터 사건 당일 공원 곳곳에서 조나단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수군댔다. 특히 세카나니 게이트와 올리무티에크 게이트 근처의 마을에서 이런 소문이 돌았는데, 이 지역은 공교롭게도 줄리의 토막 난 유골이 발견된 장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워드는 또한 조나단이 운영하던 농장이 사건 발생 후 갑자기 문을 닫은 점도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딸이 사망한 직후인 1989년 초, 케냐를 방문한 워드는 세레나 산장에서 출발해 사건 현장까지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여러 곳의 농장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한 곳만 유독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농장들은 가시 울타리가 둘러쳐진 허름한 농가였던 반면, 이 농장의 건물은 현대적인 데다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농작물들도 가지런히 줄지어 심어져 있는 등 관리가 꽤 잘되고 있는 듯 보였다. 운전기사의 말에 따르면 그 농장은 대통령의 아들인 조나단의 소유였다.
하지만 2년 후, 다시 방문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깔끔했던 울타리는 손상된 채 무너져 있었고, 더 이상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 전반적으로 황폐한 상태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묻는 워드에게 운전기사는 “조나단은 더 이상 여기에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요?”라는 워드의 물음에 운전기사는 “2년 전쯤부터요”라고 대답했다.
워드의 이런 의심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줄곧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었다. 사건 당시 자신은 현장 근처에 가지도 않았을 뿐더러 줄리라는 여자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확실한 물증이 없어 조나단을 법정에 세우지 못하던 워드가 결정적으로 확신을 갖게 된 계기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서였다. 워드는 “나는 조나단이 현장에 있었고 이를 목격했다고 증언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난 자리에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었다”고 말했다.
워드가 만난 그 목격자는 이브라힘 초게라는 인물로, 조나단과는 친구 사이이자 모이 대통령의 딸 도리스와 결혼한 처남매부 사이였다. 초게의 주장에 따르면, 사건 당일 조나단은 술에 취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숲길을 달리던 중 우연히 세레나 산장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줄리를 만났다. 처음에는 농담이 오갔지만 점차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곧 조나단은 줄리를 성폭행했다. 초게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조나단의 부하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급기야 조나단은 부하들에게 줄리를 살해한 후 시신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 이후 초게는 조나단과 절교했다. 이와 관련, 또 다른 익명의 제보자는 조나단과 초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던 때를 회상했다. 당시 초게가 조나단에게 “네가 마라에서 그 여자에게 한 짓 때문에 언젠가는 네 이름이 전 세계에 도배될 것”이라며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연일까. 얼마 후 초게는 자동차 사고로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체신부 장관을 지낸 초게의 부친인 킵툼 초게는 아들이 살해된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아들의 손목에 밧줄 같은 끈에 묶인 듯한 자국이 있었다는 점, 또한 겨드랑이와 허리 사이의 양쪽 옆구리에 커다란 멍자국이 세 군데 있었다는 점 등이 타살 증거라는 것이었다. 시신을 부검한 의사는 어딘가에 매달린 채 야구방망이 같은 무거운 둔기로 구타를 당해 비장이 파열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요한 목격자로는 한때 조나단의 부하로 일했던 발렌타인 오후루 코디포가 있었다. 케냐 법정에서 증언한 후 즉시 망명길에 올랐던 코디포는 20년 이상 덴마크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나가다 2009년 사망했다. 법정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나단의 지시에 따라 줄리가 살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독재자였던 모이 정부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 행위와 음모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덴마크에서 여러 차례 코디포를 만났던 워드는 그때마다 “조나단이 줄리를 성폭행한 후 부하들에게 줄리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나단은 단 한 번도 법정에 선 적이 없었다. 그 후 2019년 조나단은 자동차 경주 도중 사망했고, 모이 대통령 역시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딸의 억울한 죽음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없어져 버린 셈이다.
워드는 영국 경찰과 정부 역시 사건을 은폐하는 데 일조했다고 비난했다. 요컨대 당시 영국 정부는 케냐 정부와의 관계 유지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워드의 조사를 방해하고 주장을 묵살했으며, 이에 대해 워드는 “정직과 공정함에 대한 영국의 명성을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워드는 “영국 정부는 나보다 케냐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들은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케냐 정부의 은폐를 지지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이 잦아들기를 바랐다”면서 “그들이 그 사건을 카펫 아래로 쓸어버리려고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집요해질 것이다. 나는 계속할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다짐했다.
그가 생전에 그토록 바랐던 진상 규명과 케냐와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워드의 두 아들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제작과 책 출간을 통해 억울한 누이의 원한을 풀어주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