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발’ 보여준 뒤 ‘닭’을 팔아?
직장인 정 아무개 씨(여·27)는 지난 4월 낯선 번호가 찍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을 ‘W 은행 대리’라고 소개한 A 씨는 다짜고짜 연금성 보험이 새롭게 출시됐다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놨다. 우량은행에서 출시된 보험 상품이라는 말에 솔깃한 정 씨가 관심을 보이자 A 씨는 “직장인이라면 하나씩은 가입해야 하는 보험이다. 시중에 이만한 혜택을 제공하는 상품이 없다”는 말로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결국 정 씨는 월 10만 원을 납입하는 연금성 보험을 들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을 진행했다. 보험계약임에도 불구하고 절차는 너무도 간단했다. 본인확인절차를 위해 주민번호를 불러준 뒤 A 씨가 읽어주는 말만 듣고 “네, 네” 몇 번 대답을 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며칠 후 도착한 보험증서를 본 정 씨는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험증서에는 W 은행이 아닌 일반 보험사에서 판매하는 상품에 가입이 돼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정 씨처럼 은행을 사칭한 보험 판매에 속아 피해를 입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보험사’ ‘캐피탈’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화를 끊어버리지만 은행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사칭 보험판매 행위는 보험사보다 은행이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전화를 건 사람이 공교롭게도 주로 거래하는 은행을 사칭해 상품을 소개할 경우에는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더욱 높다. 여기에 시중에 나와 있는 다른 상품에 비해 월등한 혜택이 있다는 말까지 곁들여지면 계약은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이들이 처음부터 은행 이름을 팔았던 것은 아니다. 원래 다수의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은 영세 대리점 직원들이 경우에 따라 자신의 소속을 바꿔가며 영업을 해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동일하지만 그 사람이 매번 다른 보험회사 소속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일이었지만 이것은 엄연히 합법적인 영업활동이었다.
문제는 보험회사 직원만으로는 영업의 한계를 느낀 이들이 상품과는 전혀 무관한 은행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은 의심을 하는 고객들에게는 “방카슈랑스 제도 도입 이후로 은행에서도 보험을 팔 수 있게 됐다”며 둘러댔다.
방카슈랑스 제도는 지난 2003년 국내에 도입됐으며 은행이나 보험사가 다른 금융부문의 판매채널을 이용하여 자사상품을 판매하는 마케팅전략을 말한다. 이 제도로 인해 보험사 대리점처럼 은행에서도 직접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를 악용해 불법영업을 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방카슈랑스 제도가 도입됐다고 하더라도 실제 모든 은행에서 보험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험 상품 영업은 일부 계약이 된 지점에 국한되며 자격을 갖춘 일부 은행원(지점별 1~2명 수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은행원이 외부로 나가 영업하거나 전화로 보험 판매를 하는 행위 자체는 법으로도 금지돼 있다. 은행에서 제공하는 상품들도 직접 출시한 것이 아니고 계약을 맺은 보험사의 상품을 판매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소비자들은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사기를 당하고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보험증서를 꼼꼼히 확인하지 않는 이들은 어떤 보험에 가입됐는지도 모르다가 해약이 필요한 상황에서야 사태를 파악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면 해약이 쉽지 않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약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계약 직후에도 해약을 하기도 쉽지 않다. 앞서 예로 든 정 씨의 경우에도 보험증서를 받자마자 해약의사를 밝혔으나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 화가 난 정 씨가 보험증서와 함께 온 명함을 들고 직접 사무실을 찾아가 항의를 한 끝에서야 겨우 해약을 할 수 있었는데 가입 당시 납입한 10만 원은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상품을 판매했던 A 씨가 W 은행 대리가 아닌 여러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이라는 점도 그 때서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불법행위가 버젓이 이뤄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력한 대책마련이 시급함에도 은행과 보험사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종종 계열사 보험회사에서 은행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어 쓰지 말라 권고조치를 내린 적은 있다. 하지만 타 보험회사가 우리 이름을 쓴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며 “은행을 사칭하는 행위는 불법이지만 우리가 직접 고용한 사람도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워낙 보험사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불법 영업이 이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험사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는 “우리가 은행을 사칭해서까지 보험을 팔 이유가 없다. 그 영업사원이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험설계사든 대리점 영업사원이든 그런 식으로 상품을 팔지 않는다. 은행에서 따로 영업사원을 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은행원이 보험 상품을 팔면 본인에게도 수수료가 떨어지는데 이를 노린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다른 보험사 관계자 역시 “종종 대리점 보험모집인들이 약관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보험계약을 받아내는 경우는 있지만 은행을 사칭해 영업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부회장은 “보험사 모집인이 은행직원을 사칭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한 번 피해를 입으면 구제가 어렵다. 법적으로는 보험가입 무효처리가 가능하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금전적인 손해를 보상받기는 더욱 어렵다. 충동적으로 보험 가입을 하지 말고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