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작전’ 같은 불법 거래 정황, ‘마카오 커넥션이 본질’ 지적도…중국 정부 ‘모르쇠’ 전략 펼 듯
7월 10일과 11일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한국을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라고 지칭했다. 통상 남조선 혹은 괴뢰 남조선이라고 한국 정부를 지칭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표현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한국 정부를 향해 ‘너는 너 나는 나’ 스탠스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제는 조국통일 및 민족해방 대상으로서 남조선이 아니라, 각자도생하는 별개 국가 의미로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언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소식통은 “통일 및 민족해방이 북한 정권 내부 결집을 공고화하는 단골 소재인 것을 고려했을 때 이런 정치적 메시지를 포기할 정도로 북한이 코너에 몰려 있다는 부분을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김여정이 담화를 통해 겹화살 괄호를 쓰며 ‘미국의 특등 앞잡이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봤을 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자체를 조롱함과 동시에 통일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뉘앙스를 전했다”면서 “통일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오히려 역설적인 흥정에 나선 국면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정부를 향해 ‘너는 너 나는 나’ 메시지를 전한 북한은 최근 들어 중국과의 밀착관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국제사회는 중국발 북한 석유 밀수 이슈를 문제 삼았다. 미국과 일본을 필두로 구성된 G7, EU, 한국, 호주, 뉴질랜드 등 자유진영 국가들은 중국이 북한에 석유를 밀수한 것을 두고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위반 가능성을 제기했다.
7월 21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G7, EU, 한국, 호주, 뉴질랜드는 장쥔 중국 유엔대사에게 서한을 통해 “북한이 싼사만 중국 영해(푸젠성 동북부 해역)을 석유 제품 무역 피난처로 활용하며 유조선이 활동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는 내용을 전했다. 북한 석유 밀수 관행은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 영해상에서 지속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관련 증거를 함께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12월 채택된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제2397호는 북한이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해마다 수입할 수 있는 정제유 규모를 50만 배럴(약 7만 톤)로 제한했다. 그러나 북한은 공해 및 인근 해역에서 선박 간 환적(물품 옮겨 싣기)을 통해 정제유를 불법 거래한 것으로 파악된다. 바다 위에서 석유를 옮겨 싣는 방식으로 대북제재를 돌파한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는 상황이다.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석유 밀수 배후로 지목된 건 중국이다.
유엔 주재 중국 대표부는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발송한 서한과 관련해 “중국은 안보리 제재 결의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대표부는 “중국은 관련 당사국들이 북한에 대한 대북제재 결의 중 대화 재개, 외교적 노력 강화, 정치적 해결 촉진과 관련한 조항을 완전히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고 엄포를 놨다. 석유 밀수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
7월 24일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국제사회가 중국 유엔대사에 서한을 보냈다는 외신 보도에 대해 “중국은 안보리 결의를 집행하는 문제에 있어서 일관되게 국제적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 왔다”고 일축했다.
중국 현지 소식통은 “중국 국가 전략 차원에서 북한은 반드시 생존해야 하는 정부”라면서 “다만 중국 역시 유엔 소속인 까닭에 안보리 대북제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대안으로 중국 정부는 과거부터 ‘투트랙 전략’을 취해왔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민간기업 행동과 정부 행동을 분리하면서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전략”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돌연 실종된 사건은 중국 정부가 민간 기업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힌트다. 모든 민간 기업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게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다. 중국 영해 및 인근 공해상에서 정부가 알지 못하는 석유 환적 작업이 이뤄질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안보리 제재 위반 책임을 묻는 국면에선 정부와 민간기업 사이 선을 확실히 그으며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하면서 유야무야 이슈를 넘기는 모양새다.”
실제로 중국발 북한 석유 밀수 주체로 꼽힌 건 중국 정부가 아니다. 국제사회 일각에선 북한 석유 밀수 주체로 중국을 대표하는 국제 폭력조직 연합 ‘삼합회’를 꼽고 있다. 지난 3월 말 영국 언론 파이낸셜타임스는 영국 싱크탱크인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와 공동으로 중국에서 북한으로 석유가 이동한 경로를 추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북한 석유 밀수 과정에 삼합회 지회인 ‘14K’가 연루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9월 25일 오전 10시 39분경 유조선 ‘유니카호’가 북한 남포항 서쪽 해안에서 북한 선박에 석유를 전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작업이 이뤄졌다. 유니카호 소유주는 홍콩 석유 무역상 게리 토 소유로 알려져 있다.
게리 토는 마카오 원정 도박장 ‘정킷방 대부’로 꼽히는 앨빈 차우 선시티 회장과 비즈니스 파트너다. 앨빈 차우는 ‘정킷방 대부’로 불리면서 ‘14K 삼합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석유 밀수에 등장한 유니카호가 실질적으로 14K 지휘 아래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까닭이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14K가 활동하는 마카오는 북한이 주요 공작 거점으로 활용하는 지역”이라면서 “과거부터 자금세탁, 무기 밀매, 마약 거래 등 북한이 현찰을 공급하는 주요 사업이 이뤄진 무대가 마카오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마카오 소재 원정 도박장 ‘정킷방’은 북한이 해킹 등 범죄 행위로 탈취한 주요 자금을 세탁하는 ‘세탁소’ 역할을 겸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니카호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 아니냐는 의혹 중심에 선 14K는 마카오 정킷방 중 40% 규모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북한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 사이에선 김정일 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진 ‘마카오 커넥션’이 이번 석유 밀수 논란 이면 핵심적 본질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인 1999년엔 ‘범죄와의 전쟁’에 필적하는 범죄조직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이때 14K 선대 수장인 완콕 코이가 붙잡혔다. 그 뒤로 앨빈 차우 선시티 회장이 14K를 물려받았다.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 뒤 앨빈 차우는 광둥성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 자선사업가 등 행보를 펼치며 폭력조직 수장 이미지를 지워갔다. 중국 현지에서 각종 애국영화 제작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앨빈 차우가 이끄는 선시티그룹은 2019년 국내에서 일어난 버닝썬 사태 때 ‘삼합회 연루 의혹’ 중심에 서며 국내에서도 인지도를 알린 바 있다. 앨빈 차우는 지난 1월 18일 불법 도박, 범죄조직 운영, 사기 등 혐의로 징역 18년을 선고받았다.
앞서의 중국 소식통은 “중국 정부 입장에선 북한 석유 밀수에 삼합회 등 폭력조직이 연루될수록 더욱 ‘모르쇠’로 일관하기 좋은 상황”이라면서 “범죄조직 범죄행위를 정부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에 대한 석유 밀수 관련 진상을 중국 정부 채널을 통해 규명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