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라인’ 없이 김혜수와 미묘한 관계성 호평…“분량 적은 조연, 주연보다 더 어려워”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자아내는 ‘캐스팅 뒷담화’를 이어가던 배우 조인성(42)은 영화 ‘모가디슈’(2021)에 이어 류승완 감독과 재회하게 된 계기를 “같은 강동구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해 다시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모가디슈’에선 극의 중심에서 든든한 한 축을 맡고 있었지만 이번 ‘밀수’에서 그의 분량은 다소 줄어들었다.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존재감과 빛을 잃지 않는 것이 또 조인성만의 능력일 터고, 이를 믿고 그에게 역할을 제안한 것은 류승완 감독의 안목일 터였다.
“제가 ‘모가디슈’ 홍보에 들어가기 전에 이 작품을 하기로 (류승완 감독과) 약속했었는데, 만일 ‘밀수’에서 제 분량이 좀 더 많았다면 아마 출연하지 못했을 거예요. 곧바로 ‘무빙’을 촬영하기로 돼 있어서 제겐 3개월밖에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감독님과 이 정도 사이가 되면 대본은 큰 의미가 없죠(웃음). 그저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만 서로 이야기하고, 캐릭터 빌딩은 그 다음부터 서서히 진행하면 되는 거거든요.”
영화 ‘밀수’는 군천이라는 가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물질을 하며 살아가다 생계의 위협을 맞닥뜨린 해녀 무리가 어쩔 수 없이 밀수 범죄에 뛰어들게 된 이야기를 그린다. 극 중 조인성이 맡은 권 상사는 월남 전쟁에서 귀환해 이른바 ‘전국구 밀수왕’이 된 위험한 남자로, 오해로 인해 해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또 다른 밀수꾼 춘자(김혜수 분)와 더 큰 밀수판을 위해 손을 잡게 되는 인물이다. 해녀들의 과거 이야기가 다소 루즈하게 이어진다는 지적이 있었던 초반부에서 본격적인 범죄 액션이 펼쳐지는 중반부로 ‘스피디하게’ 전환되도록 만드는 독특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는 권 상사가 나타난 이후부터 국면 전환이 이뤄져요. 저는 그걸 만드는 ‘브리지’(다리) 역할이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류승완 감독님과 신뢰가 있는 배우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판단으로 저를 택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새로 함께하는 배우와 중요한 브리지를 만들어가긴 조금 부담감이 있었을 테니까요. 아마 감독님 안에 데이터를 가진 배우와 작업하면서 확실하게 찍어보겠다는 마음이 아니셨을까 싶은데, 나중에 한번 여쭤봐 주세요. ‘조인성 왜 쓴 거냐’고(웃음).”
국면 전환을 위한 중요한 캐릭터지만 관객들 사이에서는 조인성이라는 배우의 이름에 비해 분량이 조금 적지 않느냐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왔다. 반면 배우 본인은 “분량에는 전혀 욕심이 없다”며 오히려 촬영 당시 자신이 가장 주목하고 걱정했던 건 적은 분량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민폐 없이 제 몫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정말 몸 풀 새도 없이 그냥 ‘빡! 빡!’ 하면서 촬영했어요. 저 살기 급급하다 보니 ‘이걸 대체 어떻게 해내야 되나’ 이 생각만 들었죠. 사실 분량이 적다는 건 그만큼 그 안에서 제 몫을 확실히 해내야 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밖에요. 진짜 오랜만에 땀이 다 나더라니까요(웃음). 민폐를 안 끼쳐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긴장을 많이 했어요.”
조인성은 짧게 짧게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 주연으로 연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극 중에서 별도의 구체적인 배경과 전사가 보이지 않는 권 상사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그저 그 짧은 시간에 관객들에게 한 번에 와 닿을 수 있는 ‘이미지’에 집중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정의한 권 상사의 이미지는 ‘품위’ 그 자체였다고도 덧붙였다.
“권 상사는 전국구 밀수왕의 ‘품위’를 갖춘 사람이죠(웃음). 전국구라는 이름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전국구인데, 라는 데서 오는 그 품위가 있었던 것 같아요. 보면 권 상사는 박정민(장도리 역)처럼 혓바닥을 낼름낼름 거리지도 않죠(웃음). 그런데 그 품위가 깨질 때 본연의 모습이 나와요. 사실 그런 모습을 다채롭게 보여줘야지 품위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 지키면 재미가 없어요. 그런 것들이 섞이니까 비로소 인물이 완성되는 것 같더라고요.”
권 상사와 장도리가 펼치는 긴장감 넘치는 액션 신도 ‘밀수’의 백미였지만, 춘자와 권 상사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감정선도 관객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보통 범죄 액션 장르에서 남녀 캐릭터가 등장할 경우 성적인 긴장감을 주기 마련이고, 그런 클리셰 안에서는 꼭 애정 신이 이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밀수’는 이 고정관념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로맨스보단 비즈니스로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이 둘의 관계성은 관객들에게 도리어 더 큰 해석의 여지를 열어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둘의 사이에 대해 관객 분들이 더 많은 해석을 해주시는 건 ‘케미스트리’ 덕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두고 저희가 ‘그 연기는 사실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고 얘기하면 다른 방향으론 느끼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까요. 아마 김혜수 선배님도, 저도 멜로가 가능한 배우들이라 더 그렇게 느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제 생각에 액션 신 때 권 상사가 춘자를 보는 눈빛은, 춘자가 무서워하고 있으니 밀수왕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놀라지 마라, 저런 애들 비일비재하다. 이런 거 다 겪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게 뭐 큰일이라고’ 하며 안심시켜주는 것이라고 봤어요. 그게 장도리와는 다른 권 상사의 품위인 거죠(웃음).”
이런 품위에 더해져 ‘밀수’에서의 조인성은 대중들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잘난’ 모습으로 관객들을 감탄시킨다. 류승완 감독이 본인의 소싯적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찬사 아닌 찬사(?)를 보낼 만큼 잘생긴 권 상사는 언론시사회 때 기자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얼마 나오지도 않는데 잘생겼다고 좀 많이들 말해달라”고 당부한 조인성은 자신 역시 ‘밀수’에서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렇게 (외모적인) 터치를 받았던 작품이 거의 없었어요. ‘안시성’ 땐 조인성인지도 모르게 나왔고, ‘더 킹’ 땐 지질한 검사였으니까요. 그래도 저도 한 25년 정도 배우를 했는데 그런 거(잘생기게 나오는 거) 한 번 정도 있어도 되잖아요(웃음). 이런 부분에서 나이가 주는 어드밴티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란 직업군으로 봤을 때 배우가 나이 들어간다는 건 잘 익어간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젊었을 때보다 지금 이렇게, 이 순간 그런 터치를 받는다는 게 류승완 감독님과 저의 케미스트리이지 않았을까 싶죠.”
올해 데뷔 25년 차인 조인성은 로맨스부터 액션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체 불가능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는 특히 ‘밀수’에 이어 디즈니 플러스의 야심작 ‘무빙’까지 연이은 대작 행렬에 이름을 올리며 대중들의 더 큰 기대를 자아내고 있다. 여전히 업계인들이, 그리고 대중들이 변함없이 조인성을 찾고, 기대하고, 만끽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기대에 부응하는 신뢰를 탄탄히 쌓아올렸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또 그만큼 관객들과 신뢰가 쌓였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제는 원하는 배역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제가 간택을 많이 당할 수 있게 됐으니 좀 더 자유롭게, 가볍게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아요. 30대 초중반 땐 아직 신뢰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선택할 수 없었거든요. 지금도 경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할 순 없지만, 이제는 경쟁보단 내가 나를 어떻게 매니지먼트해갈 것인가가 중요한 시점이죠. 그래서 저는 올해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가수 빼고 다 한 것 같아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