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킬링 로맨스’ ‘엘리멘탈’ 역주행 주역…‘입소문→실제 관람’ 가장 빠르게 이루어지는 소비층
올 상반기 가장 신선한 흥행으로 업계 안팎의 눈길을 끌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젊은 여성 관객이 흥행의 주역이었다. 개봉 초기에는 원작 만화의 오랜 팬 층이었던 30~40대 남성 관객들이 객석을 채웠지만, 트위터 등 SNS(소셜미디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여성 관객들의 유입이 가파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관객 유입을 위한 특전 제공 등 이벤트가 다양해지자 여성 관객들은 N차 관람(같은 작품을 여러 번 관람하는 것)을 넘어선 NN차 관람 인증까지 이어가며 장기 흥행의 기반을 다졌다.
1월 개봉해 ‘스즈메의 문단속’ 전까지 역대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1위 기록을 세웠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한 달여 만에 여성 관객 비율이 53%를 넘어서며 성비 역전을 이뤄냈다. 이후부터는 꾸준히 여성 관객의 비율이 남성 관객을 웃돌았으며 개봉 기간 동안 30~40대에 몰려 있었던 관객 연령대도 20~30대로 낮아졌다. 원작 만화를 즐겨본 세대가 아니고, 스포츠 만화라는 장르 특성상 여성 관객들의 유입을 이끌어내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입소문만으로 기본 관객의 성비 역전과 대흥행을 한번에 이뤄낸 셈이다. 개봉 후 6개월이 지난 현재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성별 예매 분포는 여성 관객이 63.2%, 연령대로는 20대가 31.3%, 30대가 32.3%를 기록하고 있다.
아쉽게 흥행은 실패했지만 여성 관객들의 입소문 덕을 본 상반기 개봉 영화 중에선 ‘킬링 로맨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상업 영화라기엔 다소 기묘한 스토리텔링과 연출 방식으로 실관람객들 사이 호불호가 극명했던 이 작품 역시 SNS를 통한 입소문이 역주행의 시발점이 됐다. 개봉 당시엔 도무지 이 기묘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관객들의 박한 평가가 이어지면서 그저 그런 영화로 묻힐 뻔했지만, 혹평을 보고 도리어 관심을 가진 이들이 관람 후 SNS에 쓴 감상평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관객 평가에서 1점과 9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작품. 합치면 10점이다” “감독 가둬 놓고 평생 이런 영화만 찍게 하고 싶다” “한국 영화계에 이런 작품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된다” “없어도 된다” 등의 감상평이 하나의 밈(Meme,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유행 콘텐츠)처럼 여겨지면서 역주행 예매 러시가 이어졌다. 다만 워낙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이다 보니 흥행 면에서는 참패했지만, 반짝 역주행이 이뤄진 것 역시 젊은 여성 관객들의 입소문 덕이 컸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킬링 로맨스’의 최종 관객수는 19만 1542명, CGV 예매 기준 최종 성별 예매 분포는 여성이 67.9%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도 20~30대가 대다수였다.
가장 최근, 새로운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도 앞선 작품들과 비슷한 추이를 보이고 있다. 6월 14일 국내 개봉한 ‘엘리멘탈’은 ‘범죄도시3’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플래시’ 등 막강한 블록버스터 영화와 상영기간이 겹치면서 박스오피스 3위로 출발하는 등 초반부터 흥행 적신호가 켜졌던 작품이었다. 더욱이 아시안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전세계적으로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해 “픽사 사상 최악의 흥행 실패작”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개봉 2주 만에 실관람객들 사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입소문을 타면서 박스오피스 1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개봉 4주 차까지 꾸준한 역주행 흥행을 이어가며 ‘더 퍼스트 슬램덩크’보다 빠르게 200만,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7월 12일 기준 ‘엘리멘탈’은 ‘범죄도시3’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을 이어 2023년 국내 개봉 영화 박스오피스 5위(361만 7246명)를 차지했으며, 이후로도 순조로운 흥행 몰이가 이어진다면 400만 관객도 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디즈니와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는 주로 어린아이를 둔 가족 단위 관객들이 관람해 왔지만 ‘엘리멘탈’의 경우는 20대 관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가족애뿐 아니라 로맨스까지 담아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폭넓게 공략한 스토리가 20대, 특히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이들의 N차 관람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7월 13일 CGV 예매 기준 ‘엘리멘탈’의 성별 예매 분포는 여성 관객이 68.8%, 연령별로는 20대가 38.4%, 30대가 26.3%를 차지했다.
영화나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문화예술계에서 20~30대 여성은 늘 주력 소비층으로 여겨져 왔지만, 특히 최근 가장 침체돼 있는 영화계에서 이 같은 여성 관객들에게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이나 ‘범죄도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어느 정도 고정 관객층을 확보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니라면 흥행 여부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입소문에 좌지우지되기 쉬워졌기 때문이라는 것. 입소문이 곧 실제 소비로 이뤄지는 가장 뚜렷한 소비층인 만큼 더욱 면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인들의 이야기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남성 관객이나 가족 관객, 연령대가 높은 관객들은 선호하는 작품이나 장르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반면 젊은 여성들은 어느 하나를 정해두지 않고 호평을 접한 뒤 곧바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제작사나 배급사가 예상하지 못한 흥행을 이들이 이끌어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특히 젊은 여성 관객들은 한 번 마음에 드는 작품을 수차례 반복해서 관람하거나, 직접 관람하지 않더라도 ‘영혼 보내기’처럼 티켓만 구매해 작품을 응원하는 문화가 이미 정착돼 있는 상태”라며 “작품의 명확한 성패를 가리는 흥행이 아니더라도 역주행 흥행을 꾸준히 이끌어온 소비층인 만큼 업계가 계속해서 주목하며 콘크리트 소비층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