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인지 무딘건지…
![]() | ||
▲ 김중수 한은 총재의 최근 행보가 시장 흐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이뤄진다. 하나는 기획재정부(미국 등 다른 나라로 치면 재무부)가 중심이 되는 재정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한은(각국 중앙은행)이 책임을 지고 있는 통화정책이다. 한은의 통화정책은 시중에 도는 돈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우면 기준금리를 낮춰 시장에 많은 양의 돈을 공급한다. 재정 정책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물가 관리나 금융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한은 역할의 중요성은 최근 유럽 재정위기를 보면 잘 드러난다. 유럽은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기로 하면서 각국의 경제 정책이 절름발이가 됐다. 정부의 재정정책 기능은 살아 있지만, 각국 중앙은행이 없어진 탓에 통화정책 기능이 사라진 것이다. 이 때문에 금융위기 당시 재정정책 외에 사용할 정책 수단이 없다 보니 정부의 곳간이 바닥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재정위기를 가져왔다.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은이지만 수장인 김중수 총재가 커다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지적이 적잖다. 지난 7월 31일 한은 거시건전성분석국 조기경보팀은 ‘국내은행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 현황 및 잠재위험 점검’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의 주된 내용은 자영업자가 주 고객인 상업용 부동산 담보대출의 증가율과 연체율이 상승하고 있어 위험하다는 내용이었다. 즉 근로자 중심의 가계대출뿐 아니라 자영업자 중심의 가계대출도 위험 요소이며 경제 침체가 계속될 경우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은 또 같은 날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대해 1350억 원을 출자했다. 주택담보대출의 고정금리 비중이 확대되도록 지원해서 가계부채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동금리 대출이 높은 경우 향후 기준금리 인상 시 이자 부담이 높아져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 뒤인 1일 한은은 앞서 언급한 ‘시스테믹 리스크’ 설문조사를 내놓았다.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의 5대 핵심리스크(5개 복수응답)로 유럽 국가채무위기 심화(91.9%), 가계부채 문제(89.2%), 부동산시장 침체(73.0%), 중국 경제 경착륙(64.9%), 미국 경기회복 지연(37.8%)을 지목했다. 특히 유럽 국가채무위기에 대해서는 감내 능력이 충분하다고 본 반면 가계부채 문제는 금융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발생확률도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처럼 가계부채에 대한 경고음이 한은 내부와 금융업계에서 나오고 있는 와중에 김중수 총재는 그다지 큰 우려를 하지 않는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당인 새누리당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국회 기획재정위 전체회의에서 “김중수 총재는 가계부채를 별로 심각하게 보지 않는 것 같다”고 질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결 중수’라고 불릴 정도로 시장의 상황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기준금리 결정도 김중수 총재의 판을 읽는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낸 사례다. 한은은 지난 7월 12일 마침내 기준금리를 3.00%로 낮췄지만 국고채 3년물의 금리는 7월 말 현재 2.85%, 5년물은 2.97%로 기준금리보다 낮은 비정상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기준금리와 국고채 금리 간 역전현상이 지속되면 장기물보다 단기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금융시장에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 타이밍을 놓치면서 시장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김중수 한은 총재의 오판은 경제 분야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최근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된 ‘직원 사찰 의혹’에서 드러났듯이 한은 직원들의 여론 흐름도 잘못 읽어 문제를 키우고 있다. 한은 내부 네트워크에는 ‘발전전략 참여방’이라는 익명 게시판이 있다. 한은 직원들이 자신의 정보 노출 없이 한은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이다. 익명이다 보니 직원들의 글이 과장되기도 하고 비방이 지나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태의 발단이 된 것은 단순한 불만 글이었다. 지난 2월 화폐수급 업무 통폐합에 따라 다른 부서로 발령 난 지방근무 직원이 인사에 대한 불만을 올렸다. 또 지난 5월 개최한 체육대회와 관련해 한 직원이 폐회행사에 직원들이 운동장에서 만드는 ‘한은’이라는 글자가 체육대회 참가자의 출석 확인용이라는 글을 올렸다. 2개의 글이 댓글을 통해 점점 확대 재생산되면서 김중수 총재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이처럼 김중수 총재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자 한은 법규실이 게시판의 일부 게시물이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 작성자 추적이 위법인지 등을 묻는 질의서를 법무법인 세종과 광장에게 보낸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은 노조는 직원사찰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사태가 커지자 한은은 국회 기획재정위 업무보고를 하루 앞둔 지난 6월 24일 문제가 된 게시판 글과 댓글, 법률 질의서와 답변서를 모두 공개하며 진화에 나섰다. 단순히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과 유언비어가 자주 올라와 방치할 경우 한은도 법률적 책임이 있는지 묻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총재도 국회 업무보고에서 “직원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면서 “보고 없이 법규실장이 직접 처리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여야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들은 부적절한 일이었다며 김중수 총재를 집중 공격했다. 이인영 민주통합당 의원은 “법률 자문결과가 (처벌에) 긍정적으로 나오면 징계 등을 추진하려 했는데 부정적으로 법률자문이 나오자 (처벌을) 중단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김중수 총재처럼 여러 조직과 한꺼번에 엇박자를 내는 한은 총재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장이나 한은 조직이 김중수 총재를 불신하는데 그런 점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면서 “김중수 총재의 임기가 2014년 3월 말까지인데 그때까지 내외부와 소통이 가능해질 수 있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준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