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납치극’에 열도 ‘충격의 도가니’
▲ 1992년 11월 6일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북한과 일본의 수교교섭 중단 기사. 북한 측은 ‘이은혜 문제’ 거론을 거부하며 퇴장했다. |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은혜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자 씁쓸했다. 훗날 이은혜의 납치문제가 일본과 북한의 외교문제로 번지자 북한은 처음에는 이은혜의 존재를 부인하다가 결국 87년에 사망했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젊은 여인이 죽었다는 것은 숙청되었거나 북한 사회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현희의 진술에 의해 북한이 공작원 교육을 위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열도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때까지 일본 경찰은 납치 일본인들을 ‘행방불명자’나 ‘실종자’로 처리했다. 물증이 없어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의 진술로 인해 이은혜가 납치 일본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행방불명자나 실종자로 처리된 사람들 중에 실제로는 납치된 사람들이 다수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갖게 되었다.
일본 언론은 자국민이 납치되었는데도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일본 정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한에 일본인 납치를 항의하고 납치한 일본인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인을 납치하지 않았다고 강경하게 부인했다. 일본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과의 회담에서 자국민 납치를 문제 삼았다. 마침내 북한으로부터 납치사실을 인정하게 하였고 몇 명의 생존자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김현희의 일본어 교관이 납치된 일본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 수사기관과 여러 언론기관에서는 이은혜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김현희와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일본 수사관들이나 언론기관들과 면담을 할 때는 안가를 공개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했다.
“이은혜의 일본 이름을 기억할 수 없습니까?”
“기억나지 않아요. 그곳에서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아요. 나도 초대소에서는 김옥화라는 가명으로 지냈어요.”
“이은혜가 자기 고향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고향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없어요.”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니 말씀해 주세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는 서로의 신분에 대해서는 숨기는 것이 기본 원칙이에요.”
김현희는 안기부에서 진술한 것 외에는 더 이상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몽타주를 작성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수사관들이 요청하자 김현희가 우리 수사관들을 돌아보았다. 수사관들은 일본 수사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 수사관들은 몽타주 요원을 데리고 와서 김현희와 몇 시간에 걸쳐 작업을 했다.
“얼굴은 약간 동그랗고 머리는 구불구불 파마를 했으며 눈은 동그란 편이에요.”
▲ 김현희 진술에 의해 그린 몽타주와 신원이 밝혀진 후에 공개된 이은혜 사진. |
김현희가 감탄을 하면서 이젠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후에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몽타주하고 비슷하여 놀랐다.
일본 수사관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이은혜의 몽타주를 공개했다. 그러나 이은혜와 비슷한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신고는 없었다. 일본 경찰에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은혜를 찾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다.
“김현희 씨에게 사진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어느 날, 일본 경찰이 실종된 여성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김현희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김현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종된 것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일본 전역에서 실종된 여성들이라 숫자가 많기도 했으나 대부분 북한이 납치한 것으로 의심이 되는 여성들의 사진이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은혜 즉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은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임을 감지하였지만 혹시 북한에 있는 그녀에게 피해가 갈까봐 실종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은혜의 신원은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91년경 어느 날 일본 잡지를 보던 김현희가 일본의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삿포로 국제공항 이름이 치토세라는 내용의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이은혜가 김현희에게 일본식 이름을 지어준다면서 여러 가지 이름을 끄적이다가 무의식중에 자기 이름이 치토세라고 말하고 당황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은혜의 이름이 치토세라고?”
수사관들은 김현희에게 거듭 확인했다.
“틀림없어요.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 측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바로 일본 경찰에 통보해 주었다. 김현희가 말한 ‘치토세’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비록 ‘치토세’가 이은혜의 본명이 아닌 술집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가명이었지만 결국 그것으로 신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일본 경찰과는 4차례의 면담이 있었다.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는 김현희를 붙들고 작은 단서라도 나올까 하여 이것저것 묻던 것을 또 묻고 하는 식으로 면담을 했다. 나는 그들의 집요한 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본 경찰 3명과 대사관 직원과의 4번째 면담이 있던 날이었다. 그들은 이은혜의 이름이 치토세였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가 다시 면담을 요청한 것인데 이번에는 실종된 몇 십 명의 일본 여성들의 사진첩을 가져와 김현희에게 그중에서 이은혜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슨 실종자가 이렇게 많아요?”
우리는 그 사진첩을 보면서 일본에서 젊은 여성들이 그렇게 많이 실종 되었다는 사실이 놀랐다.
“이것은 북한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의심되는 여자들의 사진입니다.”
일본 경찰이 정중하게 말했다. 김현희는 사진 속 인물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이 사람도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니에요.”
일본 경찰의 질문에 김현희는 계속 아니라고 하다가 거의 마지막 사진 앞에서 멈칫했다. 그녀는 사진 속의 여자를 잠시 가만히 보다가 사진첩을 다시 일본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오래전 사진이라 정확치는 않지만 이 여자 같습니다.”
김현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현희가 가리킨 사진 속 인물을 본 일본 경찰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확실히 이 여자가 맞습니까?”
“북한에 있을 때보다 얼굴에 살이 찐 모습이지만 이은혜가 맞습니다.”
김현희는 보던 사진을 슬며시 내려놓았으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조사가 끝나자 그들은 우리에게 이은혜의 신원을 이미 확인했으나 마지막으로 김현희에게 확인을 받은 것이라고자 말했다.
일본 경찰은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 이은혜의 신원을 발표했다. 치토세는 이은혜의 본명이 아니라 일본 술집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가명이며 실제로 이은혜는 사이타마 현 출신의 다구치 야에코라는 여성으로 78년 22세의 나이로 미야자키 현의 한 호텔에 두 명의 어린아이를 맡긴 채 실종된 여성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들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김현희에게 확인한 것이다.
이은혜의 신원이 확인되고, 당시 같은 시기에 열리고 있던 제3차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이은혜 문제가 의제로 떠오르자 북한은 다구치 야에코의 납치사실을 부인하면서 격렬하게 화를 냈고 교섭은 결렬되었다.
납치문제가 다시 부각된 것은 1997년 2월이었다. 20년 전에 니가타 현에서 행방불명이 된 ‘요코다 메구미(당시 13세)’라는 여학생이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범행으로 일본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 문제는 일본과 북한의 최대의 정치 현안이 되었다.
“납치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합작하여 날조한 사건이다.”
북한은 처음에 납치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일본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김정일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는 내용의 납치사실을 시인했다. 그 후 생존자 5명은 24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그들의 자녀들도 2004년 5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 후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김현희와의 연관성은 부인했지만 다구치 야에코가 86년 7월 사망했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북한은 이은혜, 다구치 야에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으나 많은 증인들에 의해 다구치 야에코가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교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북한에 있을 때 아는 운전사가 1986년 가을 평양 시내 백화점에서 다구치 야에코가 쇼핑하는 모습을 보았다.”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귀국한 납치 피해자인 지무라 후키에 씨(1987년 후쿠이 현에서 납치, 당시 23세)가 증언했다.
“다구치 야에코가 일본어를 가르친 공작원은 ‘오카’라는 이름이었다.”
지무라 후키에가 증언했다. ‘오카’라면 바로 김현희가 공작원이 되면서부터 사용하던 가명 ‘김옥화’를 말하는 것이다. 지무라 후키에는 또 다른 증언도 하였는데 요코다 메구미도 여성 공작원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그 공작원의 이름은 ‘스키’라는 것이었다. 스키는 바로 김현희와 함께 광저우와 마카오에서 해외 공작 실습을 하였던 공작원 김숙희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는 김숙희가 일본어 교육을 받은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86년도에 중국 광저우에서 불법체류자들에게 합법적 신분을 부여한다는 정보에 따라 몇몇의 공작원들과 마카오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을 때 사용한 여권의 이름이 김현희는 하치야 마유미, 김숙희는 다카하시 게이코였다고 진술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