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가 사칭한 일본 변호사 오래전부터 업무 관련 살해 협박당해…한일 공조 수사 진행중
#"이재명 살해" "서울시청 폭파"
일본발 테러 협박은 8월 7일부터 시작됐다. 8월 8일 경찰과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지난 7일 0시 30분쯤 “8월 9일 15시 34분까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살해하지 않으면 서울 시내 도서관 반경 334m에 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이메일이 서울시 공무원 등 여러 명에게 발송됐다. 이메일은 일본 계정으로 발송됐으며 “야쿠오 법률사무소의 야마오카 유우아키(山岡裕明)가 시한폭탄을 설치했다”는 내용과 함께 실제로 존재하는 일본 법률사무소의 전화번호도 적혔다.
국회사무처 경호기획관 관계자는 “발신자 주소에 ‘jp’와 ‘law’가 적혀 있는 등 일본의 법률사무소 계정이었다”며 “인터넷 주소(IP) 확인 결과 실제 일본 해당 지역에서 메일이 발신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8월 9일 오전 10시께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대사관, 남산타워, 일본인학교를 폭발시키겠다”는 이메일을 받았다는 신고가 112에 접수됐다. 이메일 수신인과 발신인, IP 모두 이재명 대표 테러 협박 메일과 동일한 것으로 경찰은 파악했다.
8월 14일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서울시청 내 여러 곳에 고성능 폭탄을 설치했다. 폭파 시간은 8월 15일 오후 3시 34분'이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전날 오후 국내 언론사 등에 발송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 메일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카라사와 타카히로(唐澤貴洋)의 이름으로 발송됐으며, 그가 속한 법률사무소 주소와 연락처도 있었다.
8월 16일 오전 9시께에는 폭탄 테러를 예고하는 내용의 이메일 2통을 받았다는 112 신고가 서울시청으로부터 접수됐다. 메일은 하루 전인 15일에 발송됐으며 대검찰청과 부산·대구·수원·화성시청, 서울대·연세대·고려대·포항공대 등이 언급됐다. 일본의 법률사무소 명의로 발송됐으며 폭발물 2억 7000만여 개를 설치, 16일과 17일 오후에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예고했다.
8월 17일 0시께 일본 대사관과 일본인 학교, 대법원, 지하철역 등을 폭파하겠다는 메일이 국내로 발송됐으며, 대구·인천·성남·안양·부천·안산·고양시청도 테러 대상으로 지목됐다. 작성자는 "바늘이 박힌 고성능 폭탄을 설치했다. 폭파 시간은 8월 18일 오후 3시 34분부터 8월 19일 오후 2시 7분"이라고 적었다. 메일은 이재명 대표 테러 예고 때와 같이 일본의 법률사무소 계정으로 발송됐으며, 발신자는 카라사와 타카히로였다.
#메일에 언급된 변호사들 누구
카라사와 타카히로 변호사를 사칭한 폭탄 테러 협박은 일본 현지에서 이미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2016년 10월 21일 일본 공영방송 NHK ‘뉴스 워치 9’ 보도에 따르면 그해 일본 전역 주요 도시에 137건의 폭파 예고가 있었고 이 가운데 73건의 메일 발신자에 ‘카라사와 타카히로’라고 적혀 있었다.
카라사와 변호사는 NHK에 “나에 대해 업무방해를 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며 “어떻게 해도 용서 받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본인에 대한 살해 협박은 물론 가족의 묘지에 낙서를 당하는 등 오프라인에서도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이 비춰졌다.
카라사와 변호사가 사이버 불링을 당하게 된 계기는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2ch’(‘5ch’의 전신) 유저들과의 악연에서 비롯됐다. 2012년 3월 그는 2ch ‘뭐든지 실황 J 게시판’(난J)에서 악플과 신상 털기의 타깃이 된 피해자를 변호하게 됐다. 피해자는 특정 사용자에게 욕하는 등의 행위를 해 ‘난J’에서 평판이 안 좋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카라사와 변호사는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합의금을 받아 내거나 고소를 하는 것이 아닌 IP 공개 청구를 하게 됐는데, ‘난J’ 유저들은 이를 계기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카라사와 변호사를 조롱하는 데 동조한 ‘난J’ 유저들은 그가 다녔던 ‘항심종합법률사무소(恒心綜合法律事務所)’와 옴진리교를 패러디한 ‘코신교(恒心教, 항심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카라사와 변호사를 존사(尊師·옴진리교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를 부르는 말)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다.
‘난J’ 유저들은 카라사와 타카히로가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했던 캐리커처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의 캐리커처에 혐한 문구를 덧붙인 사진을 트위터를 통해 무작위의 한국인 사용자에게 퍼트렸다. 그리고 카라사와 타카히로가 화장실을 가지 못한 채 배변을 한다는 이야기의 영상부터 그를 소재로 한 호러물 영상 등이 그를 인신공격하기 위해 제작됐다.
카라사와 변호사는 8월 9일 엑스(X·트위터 후신)를 통해 이 대표 협박 메일 기사를 언급하며 "내 이름이 허락 없이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이런 종류의 범죄를 단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밝혔다.
메일에 적혀있던 야쿠오 법률사무소는 일본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야쿠모 법률사무소’를 잘못 읽은 것이며, 야마오카 유우아키도 ‘裕’의 훈독 ‘히로’를 음독 ‘유우’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야마오카 히로아키 변호사는 카라사와 타카히로의 이전 소속인 법률사무소 크로스의 대표 변호사였다. ‘난J’ 유저들은 야마오카 변호사도 조롱하고 있다.
야쿠모 법률사무소는 5월 26일 ‘[주의하세요] 당사 또는 당사의 변호사명을 속인 악성 메일에 대해’라는 제목과 함께 “당사 또는 당사 소속 변호사의 이름을 속인 악성 메일 발송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당사 또는 당사의 변호사는 이러한 사례와 일절 관계가 없다”며 “당사 또는 당사의 변호사를 자처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경우에는 충분히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하고 주의해 달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용의자 30대 이상일 가능성”
이웅혁 건국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일본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불링과 그들을 발신자로 사칭한 테러 협박 메일이 오래전부터 있던 정황을 봤을 때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 협박 메일은 그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특히 협박 메일에서 ‘334’가 꾸준히 언급된 점에 주목했다. 334는 2005년 일본프로야구 일본시리즈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당시 퍼시픽리그 우승팀 지바 롯데 마린스가 센트럴리그 우승팀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해 4:0 시리즈 스코어로 우승했다. 특히 양 팀 득점 합계가 33-4로 압도적인 결과를 보였다. 일본 네티즌 사이에서는 큰 패배나 아주 절망적인 상황, 허탈한 상황이거나 남을 조롱할 때 쓰는 인터넷 용어다.
이 교수는 “‘334’가 오래 전에 생긴 용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용의자는 20대 등 신세대가 아닌 30대 이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어 “수사 당국이 메일에서 334의 또 다른 의미를 빠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일본 경시청 및 정보기관과 공조해 하루 빨리 검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찰은 메일이 일본 내 인터넷 주소에서 발송된 사실을 확인하고 일본 경시청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법무부를 통해 형사사법공조 절차를 밟고 있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수사에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다.
노영현 기자 nog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