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점 이상 ‘회사 미술품’ 공개 약속이행 촉구 소송…회사 측 돌연 “의무 없다” 주장해 ‘말 바꾸기’ 비판
이런 가운데 회사 측이 애초에는 미술품 공개를 약속해 온 사실이 확인돼 돌연 입장을 바꾼 배경에도 이목이 쏠린다. 일신방직은 최소 100여 점의 미술품을 보유했으며, 여기에는 세계적 거장의 작품들도 포함된 사실까지는 파악됐다.
#회사 돈 미술품
일신방직은 1951년 설립돼 반세기 넘게 면사 생산의 한 우물만 파 온 기업이다. 섬유산업 후퇴로 여러 차례 고비가 있었으나, 대규모 자동화설비 구축 등으로 이겨내 왔다. 현재 시가총액은 약 2200억 원, 2022년 기준 당기순이익 1146억 원을 기록하는 등 선전을 이어가고 있다. 계열사인 패션·의류 브랜드 '지오다노'가 유명하다.
제조업체지만 미술계에서도 유명한 회사다. 김영호 일산방직 회장(79)이 미술대학 졸업 작품전을 직접 찾아다닐 정도로 미술에 애착이 크기 때문이다. 매년 1월 11일이면 원로 화가 20여 명을 초청해 직접 식사를 대접하고, 직접 구입해 소장하는 미술품도 300여 점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실제 서울 여의도 일신방직 본사 사옥에도 작품 수십여 점이 전시돼 있다. 한남동 사옥에도 작품들이 많이 걸려 있어 일대에서는 작은 미술관으로 불린다. 2018년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해당 작품들의 큐레이터도 김 회장이 직접 맡았다고 한다. 아무나 볼 수 없지만 회장 집무실 내부에도 미술품이 많다고 전해졌다.
다만 이 미술품의 상당수는 김 회장 사재가 아닌 회사 자금으로 구입한 물건들이다. 오너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기업 구성원들과 주주들은 각 작품의 현황과 가치를 알 수 없어 문제 제기를 지속해 왔다. 가격이야 감정평가를 거쳐 추산할 수도 있지만, 어디에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게 문제다.
#'최소 139점' 현황 불투명
결국 이 기업 지분 4.36%를 보유한 소액주주 34명은 8월 21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 회사가 소장한 모든 미술품의 목록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취지의 열람등사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일신방직 소액주주들이 2022년부터 계속 요구해온 사안이다. 상법에 따라 지분 3% 이상을 보유하면 사측에 장부 등 열람을 신청할 수 있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일신방직이 2018년까지 구입한 미술품만 최소 139점이다. 이후로 판 적은 한 번도 없다. 1990년 이전에 14점, 1991~2000년 사이 81점, 2001~2010년 사이 5점, 2011~2018년 사이 39점을 각각 샀다. 사측은 여기까지의 총액이 49억 4000만 원으로 1점당 평균 가격이 3500만 원이라고 주장한다.
소액주주들이 구체 목록 공개를 요구하는 이유는 작품들의 가치가 회계에 축소 반영됐을 가능성 때문이다. 일신방직은 미술품을 회계상 '공구기구비품'으로 처리했다. 2022년 회사가 반영한 공구기구비품비 총액(별도기준)은 약 51억 82000만 원이다.
미술품들 가운데에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도 있다. 한 점당 거래가격이 최소 수십억 원에서 크게는 1000억 원대에 이르는 거장이다. 이는 김 회장 집무실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남동 사옥에 공개된 작품으로도 한국 추상화를 대표하는 정창섭,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등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이 밖에는 구체적으로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지조차 불투명하다. 특히 김 회장 자택에도 여러 작품이 걸려 있다고 전해지지만 구입 자금 출처는 물론 현황도 전부 알 수 없다. 주주들이 회사 자금으로 구입한 작품에 한해 작가명과 제작연도 및 현재 보관 장소 등을 보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하게 된 배경이다.
소액주주 측은 "1점의 시가가 억대는 물론 심지어 그의 몇 배로 추정되는 미술품만 여러 개인데 상식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숫자가 도무지 맞지 않는다"며 "정확한 가격이 재무제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탓에 순자본액이 감소했고, 이 때문에 회사 가치도 시장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전했다.
#말 바꾸기
주주들은 애초 소송까지 갈 일이 아니었으나 회사가 약속을 깨 문제를 키웠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2022년 12월 사측은 주주들의 열람 요구에 "매년 외부감사를 실시하므로 작품 사유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서도 "회사에 직접 방문하면 복사 불가를 전제로 건별 현황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돌연 입장이 바뀌었다. 2023년 6월 약 10명의 주주들이 회사에 방문했으나 무엇도 확인하지 못한 채 되돌아가야 했다. 사측은 당시 '제2의 라덕연 사태'로 불린 방림 등 5개 종목 무더기 하한가 사태를 들어 일정을 9월로 연기했다. 5개 종목 하한가 사태를 촉발한 소액주주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였다.
주주들은 7월 11일 다시 요청문을 보냈다. 공문에는 "지난해 12월부터 미술품 목록 공개가 일체 안 되는 상황 속 최근에도 사측은 공개 약속을 다시 9월로 미뤘다"며 "주주가치 제고가 목적일 뿐 사측이 우려할 사항은 전혀 없으니, 이미 여러 차례 약속한 미술품 열람 일정을 신속히 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사측은 '최종 불가' 통보로 답신했다. 7월 24일 소액주주 측에 "재무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적정한 범위 안에서 미술 작품을 구입했으므로 경영 상태 악화나 법령 위반 등의 사실이 없다"면서 "그러므로 당사는 주주연대의 미술품 정보 제공 요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알린다"고 전달했다.
갈등은 앞으로 더 심화할 전망이다. 일신방직 관계자는 "공개를 약속했던 게 아니라 검토하겠다는 의미였다"며 "논의 결과 무리한 측면이 있다고 판단돼 비공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목록을 요구하는 일부 주주들한테만 공개하는 것 자체도 다른 주주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고도 강조했다.
단, 이 관계자는 '모든 주주들에 공개할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공개 방식과 절차 등을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안"이라면서도 "그 역시 논의했으나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잘라 말했다. 또 "주주들이 요구하면 꼭 들어줘야 하느냐"면서 "법적 공방이 불거진 만큼 강경 대응할 방침"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소액주주 측은 "지난해부터 공개 약속을 여러 번 해왔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일찍이 특정 주주들한테만 공개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고 맞대응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감사보고서 주석 등에 명시하는 등 모든 주주가 작품 현황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의 요구인데 사측 행태는 전형적인 말 바꾸기"라고 반박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