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부모 묘소 경매로 날릴 뻔
▲ 두산가의 4세 박중원 전 두산산업개발 상무가 최근 지인으로부터 빌린 돈 5000만 원을 갚지 못해 사기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연합뉴스 |
경찰에 따르면 홍 씨는 “돈을 빌려준 이후 지금까지 박 씨는 변제를 미뤘고 연락마저 피하고 있다. 계속해서 한남동 소재 빌라 유치권만 해결되면 은행 대출을 통해 빌린 돈을 갚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알아보니 그 빌라는 다른 사람 소유로 박 씨의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홍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 씨는 고의적으로 돈을 갚지 않았다기보다는 정말 수중에 5000만 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한남동 빌라가 박 씨의 소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이용해야만 현금을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두산산업개발 상무를 역임하며 주목받는 재벌 4세였던 박 씨. 그가 이토록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된 배경에는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 재산 상태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일요신문>이 확인한 결과 박 씨는 차명으로 숨겨둔 재산이 없다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은 상황이다. 또 아버지 박용오 전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마저도 경매로 넘어가거나 압류상태임이 밝혀졌다.
현재 박 씨는 거처도 일정하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박 씨가 주소지로 사용했던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S 빌라는 지난해 11월 7일자로 임의경매가 진행 중이었다. 이 빌라는 아버지 박 전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아 형 박경원 씨(49)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곳이다. 지난 15일 직접 빌라를 찾아가봤으나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여러 부동산의 경매기록을 살펴봐도 박 씨가 등기부등본에 기재된 주소에 거주하지 않아 법원이 송부한 서류도 제때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해당 빌라 아래층은 박 전 회장이 생전 머물던 곳으로 작고 후 형 경원 씨에게 상속됐으나 이 또한 임의경매를 통해 타인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경매가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박중원 씨에게 돌아올 몫은 없을 것이라 보고 있다. S 빌라는 시가 15억 원 정도로 평가받고 있지만 박 씨 형제의 이름으로 가압류된 금액만도 400억 원이 훌쩍 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월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박중원 씨의 지분을 압류한 기록이 있어 세금체납 의혹도 일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건강보험 미납으로 압류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아니면 정확한 금액을 알려줄 순 없지만 십수 억의 자택이 압류됐다면 상당히 오랜 기간 보험료를 내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건강보험뿐만 아니라 소득세, 재산세, 법인세 등도 체납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친에게 상속받은 수많은 부동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2010년 상속과 동시에 국가로부터 압류됐다는 사실(<일요신문> 953호)이 알려진 서울 신림동 산 12×-× 임야 2분의 1 지분(2559㎡, 약 775평)과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용산리 소재 용평 제2차 콘도 M동 2××3호 5분의 1 지분은 이미 임의경매가 진행 중이었다.박 씨가 상속받은 부동산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등기부등본 확인 결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3×× 일대와 경기 광주시 탄벌동 임야 수만 평도 형 경원 씨와 공동으로 상속받았다. 하지만 이매동 땅 역시 경매가 진행되진 않았으나 각종 가압류와 근저당으로만 500억 원 상당의 금액이 설정돼 있어 재산상의 가치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경기 광주시 탄벌동 일대의 땅이다. 박 씨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탄벌동 일대 수만 평의 임야를 상속받았으나 이 역시도 지난 2011년 2월 16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의 임의경매개시결정이 접수됐다. 박 씨 형제가 보유한 다른 부동산보다 비교적 경매가 늦게 시작됐지만 처리 과정은 속전속결이었다. 경매가 진행되자마자 낙찰자가 나왔는데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과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 박태원 두산건설 부사장이 지분을 3분의 1씩 나눠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인근 부동산중개업 관계자는 “두산그룹의 땅인 것은 알았지만 총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해당 땅은) 크게 번화한 곳도 아니고 건물도 드문드문 있다. 앞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는지는 몰라도 현재로서는 돈이 될 만한 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투자 가치가 없는 땅인데도 두산가가 나선 이유는 조상의 선영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매로 나온 탄벌동 일대는 박용오 전 회장을 비롯해 그의 부인 고 최금숙 여사(2004년 별세)와 어머니 고 명계춘 여사(2008년 별세)가 모셔져 있다. 전문가는 경매물건으로 나오기 전에 손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땅에 얽혀 있는 채무관계가 워낙 복잡해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차라리 낙찰받는 것이 수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박경원·중원 형제는 부모의 묘소마저 지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박 씨 형제가 수십억 원이 넘는 재산을 상속받았음에도 직접 등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성북동 빌라를 비롯해 경기 탄벌동 땅까지 대부분의 재산 등기부등본을 살펴보면 2009년 11월 박 씨 형제에게 상속이 이뤄짐과 동시에 신용보증기금이 대위자로 등기가 돼있다. 이는 등기가 이뤄지지 않으면 채무관계를 정리할 수 없기에 신용보증기금이 나섰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윤천준 변호사는 “상속과 등기는 별개의 문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상속은 이뤄졌을지 모르지만 당사자가 직접 등기를 해야만 상속 절차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박 씨 형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금전관계가 얽혀 있는 신용보증기금이 재산 압류 설정을 위해 대위자로 나서 등기를 마친 듯하다. 이럴 경우 박 씨 형제가 재산의 존재에 대해 몰랐거나 둘 사이 재산분할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비운의 재벌’ 박용오 전 두산 회장가
‘형제의 난’ 이후 파문·빚더미·자살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잘나가는 기업가였다. 40세에 두산산업 대표이사 사장을 맡은 뒤 동양맥주 사장, OB베어스 사장, 두산상사 회장 등을 두루 거쳐 1996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두산가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당시 두산은 주력산업인 맥주사업조차 흔들릴 정도로 회사 사정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더불어 중공업을 중점으로 회사를 재정비, 2005년 두산을 재계 서열 10위에 올려놨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해 7월 박용곤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한 오너 일가가 박 전 회장에게 바로 아래 동생인 두산가 3남 박용성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 총수직을 이양하라고 통보한 것이다.
박 전 회장은 그 대가로 두산산업개발(두산건설) 계열분리를 요구했지만 원하는 바를 얻진 못했다. 그러자 박 전 회장은 박용성 회장과 두산가 5남인 박용만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의 비리를 검찰에 제보하며 법적 다툼도 벌였는데 이에 박용성-박용만 형제도 박 전 회장의 비리를 폭로해 세 사람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른바 ‘형제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 이후 박 전 회장 일가는 두산가에서 사실상 파문을 당했다. 두산산업개발 상무를 지냈던 박 전 회장의 두 아들마저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 박 전 회장은 성지건설을 인수해 장남인 경원 씨를 대표이사로 앉혀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이 역시도 막대한 빚만 남긴 채 실패했고 여기에 차남 중원 씨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지난 2007년 중원 씨가 코스닥 상장사인 뉴월코프(클라스타)를 허위 인수한 뒤 이를 공시, 주가를 올려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박 씨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박 전 회장은 2009년 11월 4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두산가의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 박 전 회장의 죽음 이후 장남 경원 씨는 성지건설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고 400억 원이 넘는 빚까지 떠안았다. 그가 대표이사로 올라있는 또 다른 회사인 두영엠아이주식회사 역시 채무관계만 있을 뿐 사실상 운영하지 않는 회사로 확인됐다. 여기에 주가조작 사건 이후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전해졌던 차남 중원 씨마저 지난 12일 사기사건에 휘말리며 박 전 회장 일가를 둘러싼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박]
극과 극 ‘망한 부자’들의 그 후죽거나 혹은 잘 살거나…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기업을 말아먹은 재벌가들의 ‘그 후’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처럼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치다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가의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고 이재찬 씨를 들 수 있다.
이 씨는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의 차남으로 재계에서는 촉망받는 3세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차남으로 60년대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와 삼성물산의 이사를 역임했으나 1966년 사카린밀수사건으로 신임을 잃었다. 이후 이창희 회장은 삼성그룹에서 독립해 1973년 새한미디어를 창업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불행이 닥쳤다. 이창희 회장이 5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 이때부터 새한그룹의 비극이 시작됐다.
이창희 회장이 사망하자 부인 이영자 여사와 장남 이재관 씨가 그룹을 운영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봉착하고 만다. 결국 2000년 새한건설과 (주)새한이 합병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재관 씨가 분식회계를 통해 불법대출을 받은 혐의로 구속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일로 당시 새한미디어와 새한건설 사장을 역임하던 이재찬 씨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가 그룹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재찬 씨도 나름 재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 사는 신세가 돼버렸다. 수년간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려온 이 씨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2010년 8월 18일 홀로 살던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한때 동아제약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51)도 평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의 신임을 받아 탄탄대로를 걷던 강 부회장은 후계 다툼에서 밀려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아버지와 형제들과 부딪쳤고 횡령·배임으로 고소까지 당했다.
결국 지난 2008년 동아제약 지분을 전량 매각한 뒤 쓸쓸히 제약업계를 떠난 강 부회장은 끊임없이 재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몇 차례 소송전에 휘말린 것은 물론이고 지난 6월에는 디지털오션 대표 시절 공금으로 개인 빚을 갚는 등 회사에 100억 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마저 가압류된 것으로 드러나 금전적 상황도 여의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기업이 망해도 혼자 잘 사는 경우도 있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은 회사가 부도나 어려운데도 거액의 자금을 인출해 호화로운 생활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약 35억 원에 이르는 돈을 아내의 차량 유지비로 쓰거나 법인카드로 골프장과 고급호텔을 드나드는 등 ‘재벌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박 전 회장은 이 같은 사실이 발각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혐의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승렬 거평그룹 전 회장도 마찬가지다. 나 전 회장은 1990년대 대동화학과 대한중석을 인수하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8년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투자를 하는 바람에 그룹이 해체되는 결과를 맞았다. 당시 나 전 회장의 보증 채무는 총 2950억 원으로 거리로 나앉는 피해자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상당한 빚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나 회장은 외아들 나영돈 씨(33)의 명의로 수천 평의 부동산을 보유하는 등 차명재산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에는 나 회장의 조카인 나 아무개 씨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자녀 이름으로 구입한 주택을 예금보험공사가 적발해 재산을 회수한 일도 있었다. [박]
‘형제의 난’ 이후 파문·빚더미·자살
▲ 고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
하지만 박 전 회장은 과감한 구조조정과 더불어 중공업을 중점으로 회사를 재정비, 2005년 두산을 재계 서열 10위에 올려놨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해 7월 박용곤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한 오너 일가가 박 전 회장에게 바로 아래 동생인 두산가 3남 박용성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 총수직을 이양하라고 통보한 것이다.
박 전 회장은 그 대가로 두산산업개발(두산건설) 계열분리를 요구했지만 원하는 바를 얻진 못했다. 그러자 박 전 회장은 박용성 회장과 두산가 5남인 박용만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의 비리를 검찰에 제보하며 법적 다툼도 벌였는데 이에 박용성-박용만 형제도 박 전 회장의 비리를 폭로해 세 사람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른바 ‘형제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 이후 박 전 회장 일가는 두산가에서 사실상 파문을 당했다. 두산산업개발 상무를 지냈던 박 전 회장의 두 아들마저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 박 전 회장은 성지건설을 인수해 장남인 경원 씨를 대표이사로 앉혀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이 역시도 막대한 빚만 남긴 채 실패했고 여기에 차남 중원 씨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지난 2007년 중원 씨가 코스닥 상장사인 뉴월코프(클라스타)를 허위 인수한 뒤 이를 공시, 주가를 올려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박 씨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박 전 회장은 2009년 11월 4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두산가의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 박 전 회장의 죽음 이후 장남 경원 씨는 성지건설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고 400억 원이 넘는 빚까지 떠안았다. 그가 대표이사로 올라있는 또 다른 회사인 두영엠아이주식회사 역시 채무관계만 있을 뿐 사실상 운영하지 않는 회사로 확인됐다. 여기에 주가조작 사건 이후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전해졌던 차남 중원 씨마저 지난 12일 사기사건에 휘말리며 박 전 회장 일가를 둘러싼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박]
▲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왼쪽 얼굴)과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기업을 말아먹은 재벌가들의 ‘그 후’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처럼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치다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가의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고 이재찬 씨를 들 수 있다.
이 씨는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의 차남으로 재계에서는 촉망받는 3세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차남으로 60년대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와 삼성물산의 이사를 역임했으나 1966년 사카린밀수사건으로 신임을 잃었다. 이후 이창희 회장은 삼성그룹에서 독립해 1973년 새한미디어를 창업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불행이 닥쳤다. 이창희 회장이 5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 이때부터 새한그룹의 비극이 시작됐다.
이창희 회장이 사망하자 부인 이영자 여사와 장남 이재관 씨가 그룹을 운영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봉착하고 만다. 결국 2000년 새한건설과 (주)새한이 합병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재관 씨가 분식회계를 통해 불법대출을 받은 혐의로 구속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일로 당시 새한미디어와 새한건설 사장을 역임하던 이재찬 씨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가 그룹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재찬 씨도 나름 재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 사는 신세가 돼버렸다. 수년간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려온 이 씨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2010년 8월 18일 홀로 살던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한때 동아제약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51)도 평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의 신임을 받아 탄탄대로를 걷던 강 부회장은 후계 다툼에서 밀려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아버지와 형제들과 부딪쳤고 횡령·배임으로 고소까지 당했다.
결국 지난 2008년 동아제약 지분을 전량 매각한 뒤 쓸쓸히 제약업계를 떠난 강 부회장은 끊임없이 재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몇 차례 소송전에 휘말린 것은 물론이고 지난 6월에는 디지털오션 대표 시절 공금으로 개인 빚을 갚는 등 회사에 100억 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마저 가압류된 것으로 드러나 금전적 상황도 여의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기업이 망해도 혼자 잘 사는 경우도 있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은 회사가 부도나 어려운데도 거액의 자금을 인출해 호화로운 생활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약 35억 원에 이르는 돈을 아내의 차량 유지비로 쓰거나 법인카드로 골프장과 고급호텔을 드나드는 등 ‘재벌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박 전 회장은 이 같은 사실이 발각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혐의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승렬 거평그룹 전 회장도 마찬가지다. 나 전 회장은 1990년대 대동화학과 대한중석을 인수하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8년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투자를 하는 바람에 그룹이 해체되는 결과를 맞았다. 당시 나 전 회장의 보증 채무는 총 2950억 원으로 거리로 나앉는 피해자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상당한 빚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나 회장은 외아들 나영돈 씨(33)의 명의로 수천 평의 부동산을 보유하는 등 차명재산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에는 나 회장의 조카인 나 아무개 씨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자녀 이름으로 구입한 주택을 예금보험공사가 적발해 재산을 회수한 일도 있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