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 저린 그들 “합죽이가 됩시다 합~!”
지난달 25일 오후 시중 은행들에는 비상이 걸렸다. 갑자기 청와대로부터 우리·신한·기업·외환·산업·수출입은행 등 6개 주요 은행장에게 다음 날 아침 이명박 대통령과 간담회가 있으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온 까닭이었다. 사전에 아무런 언질이 없었던, 갑작스러운 부름이다보니 은행들은 예정된 은행장 일정을 취소하고 무슨 내용의 간담회인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체 왜 갑자기 부르는 것일까.
일부 은행 홍보실은 안면이 있는 금융당국 관계자나 언론인들을 통해 간담회 주요 내용을 사전에 알아내려고 분주했다.
알려진 바로는 간담회 내용이 ‘수출산업 금융지원에 대한 논의’였지만 당시 사정상 아마 은행장들을 질책하기 위한 자리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대부분이었다.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의혹과 저학력자 금리 차별, 대출조작 등으로 은행에 대한 비난이 높아진 상황에서 단지 수출산업 금융지원에 대한 논의를 위해 주요 은행장들을, 그것도 하루 전날 갑자기 소집할 리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에는 서진원 신한은행장과 이순우 우리은행장, 조준희 기업은행장, 윤용로 외환은행장, 강만수 산업은행장, 김용환 수출입은행장이 모두 참석했다. 회의 시작 전 은행장들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각오를 한 듯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회의가 진행되면서 은행장들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가시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CD금리 담합의혹이나 저학력자 금리차별, 대출조작, 가계부채 등 은행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회의 제목에 나타난 대로 ‘수출산업 금융지원에 대한 논의’가 주제였다.
회의가 끝나자 은행장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청와대를 나섰다. 한 은행장은 “은행권에 압박을 가하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면서 “CD금리 문제 등에 대한 질책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중 은행들이 요즘 여러 가지 문제로 비난을 받다보니 단순한 회의에도 제 발이 저렸던 셈이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자금부서장 회의를 CD금리 담합이 이뤄지는 창구로 지목하자 시중의 주목을 받았다. 공정위는 담합을 밝혀내기 위해 업체 관련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전화를 주고받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정위 레이더에 매달 모이는 자금부서장 회의가 걸려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CD금리 담합 의혹을 받고 있는 은행들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됐다. 실제 8월 자금부서장회의에 19개 은행 자금담당자 중 참석을 희망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휴가를 갔을 리 만무한 만큼 서슬 퍼런 공정위 움직임에 먼저 몸을 사린 셈이다.
은행들은 지난해 흐지부지됐다가 다시 시작된 ‘단기지표금리 제도개선 합동 TF(태스크포스)’에 의견을 전달하는 것도 극구 꺼리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이 구성했던 TF에는 은행들도 포함됐다. 당시 금감원과 은행들은 CD금리가 시장금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CD금리를 대체할 후보로 코픽스(2010년 은행연합회가 도입한 대출 기준 금리)와 통화안정증권 금리, 은행채 금리 등을 놓고 논의했다. 하지만 이 TF는 금융위원회가 하는 업무와 중복된다는 청와대의 지적을 받고 문을 닫았다.
그러다 CD금리 담합 의혹이 불거지자 최근 금융위원회가 중심이 돼 한국은행과 금감원, 은행연합회, 금융투자협회 등이 모이는 TF를 꾸렸는데 여기서 은행들이 제외됐다. 명목상으로는 은행연합회를 통해 은행의 의견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지만 실제로는 CD금리 담합 의혹 대상이다 보니 배제된 것이다. 이런 사정 탓에 은행들은 은행연합회를 통해 의견을 전달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한 금융업체 관계자는 “CD금리 담합 의혹을 받고 있는 은행들이 CD금리를 대체할 금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괜한 논란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서 “감사원의 지적을 받고, 공정위 조사가 진행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입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각종 비판에도 기재부나 금융위 출신 관료들을 사외이사나 감사로 앉혀 놓는 데 주력하고 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바람막이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농협금융지주는 지난 1일 개최된 임시주주총회에서 2명의 신임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그중 한 명은 행시 22회로 기재부 차관을 지낸 지낸 배국환 전 감사원 감사위원이었다. KB국민은행은 재무부(현 기재부) 금융정책과장을 지낸 김중웅 전 현대증권 회장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고, KEB외환은행은 행시 17회로 재무부 국제기구과장과 공보관, 국무총리 국무조정실국장 등을 지낸 방영민 전 서울보증보험 사장을 사외이사로 임명한 상태다. KDB산업은행의 감사는 임해종 전 기재부 공공정책국장이다. 임해종 감사는 행시 24회로 재정경제부 홍보과장, 기획예산처 예산법무담당관, 기재부 공공혁신기획관 등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다.
하나금융지주는 2009년부터 김경섭 전 조달청장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 김경섭 이사는 행시 14회 출신으로 경제기획원 지역투자계획과장, 기획예산처 예산총괄심의관, 조달청장 등을 지냈다. 한국스탠다드차타드금융지주와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사회이사인 김성진 전 조달청장도 행시 19회로 재경부 국제업무정책관(차관보)를 거친 모피아 출신이다.
이준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