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할까 겁먹었나…“재판 싫어요” 완강
▲ 1989년 3월 7일 김현희가 첫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옆의 여인은 최창아 수사관으로 전날 미용실에 들러 머리모양을 업스타일로 하고 자느라 잠을 설쳤다고. 연합뉴스 |
김현희에 대한 사면은 어떻게 하여 결정이 된 것일까. 그녀가 테러범이라는 사실을 떠나 북한에서 넘어온 공작원들은 자수하거나 귀순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체포되어 전향을 하면 대부분 남한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주는 것이 당국의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간첩이나 공작원들, 심지어 무장공비까지 전향을 시켜 북한의 폐쇄성과 적화통일 야욕을 홍보하는 임무를 맡기고는 했다. 예를 들어 1·21사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까지 사형을 시키지 않고 사면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홍보하는 요원으로 활동하게 했다. 김현희의 재판과 사면에 대해서 나는 결정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나는 85년에 안기부에 입사한 햇병아리 수사관이기 때문이었다.
KAL 858기에 대한 수사발표와 기자회견이 있은 후 피의자 신분이었던 김현희는 사안의 중요성과 보안 때문에 여전히 안기부 수사관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미국, 일본, 기타 여러 나라의 수사기관들과 면담도 하고 일본과 서방 언론사들과 인터뷰도 하면서 보냈다.
우리로선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의 진상을 국내외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우리가 먼저 나설 것도 없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먼저 만나자는 제의가 왔으니 우리로선 다행이 아닐 수 없었기에 대부분 흔쾌히 만남을 허락하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기도 했다.
김현희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목사님과 성경공부도 하고 지냈다. 김현희를 보호하는 문제는 안기부의 난제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수사국 내에 가건물을 만들어 거기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원룸형태로 지어 침상과 샤워실을 만들고 커튼으로 칸막이를 했을 뿐이었다. 김현희는 1급 보안을 요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관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89년이 되자 김현희에 대한 재판 문제가 대두되었다. 김현희에 대한 처분은 불기소 처분, 기소유예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김현희에게 재판을 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왜 갑자기 재판을 받아요?”
김현희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사건이 중대한데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주목하고 있어요.”
“재판을 받기 싫어요.”
▲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김현희 첫공판’ 제하의 기사. |
검찰은 이상형 검사와 차동민 검사를 배정했고 주심은 서울형사지방법원 정상학 수석부장판사였다.
“김현희 씨, 인민검찰소에서 나온 분입니다.”
수사관들이 이상형 검사를 김현희에게 소개했다. 수사관들은 검찰을 소개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북한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자 김현희의 얼굴이 굳어지며 표정이 바뀌었다.
“인민검찰소가 뭘 하는 곳인지 압니까?”
이상형 검사가 웃으면서 물었다.
“대남공작원을 검거한 뒤에 무자비한 고문을 가해서 일급비밀을 알아낸 후 죽이는 기관 아닙니까?”
이상형 검사는 웃었다. 그는 안기부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검찰에 송치되자 검사실에서 조사했다. 김현희가 검찰에 출두할 때 출입기자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어 취재경쟁을 벌였다. 이상형 검사는 출입기자들을 내보낸 뒤에 김현희를 조사했다. 그때 갑자기 “김현희를 구속하라”는 시위대의 함성이 들렸다. 이상형 검사가 깜짝 놀라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니 연합통신 근로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구속하라는 시위였다. 그래서 안심하고 김현희를 불러서 창문 밖을 보게 했다.
“세상에 인민검찰소 앞에 와서 전직 국가원수 부부를 구속하라고 데모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김현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사는 덕수궁 옆 (현 서울시청 별관)에 있었다.
1989년 2월 김현희는 법원에 기소되었다. 이상형 검사는 수사 결과를 발표해야 했다. 그러자 특정 언론사 기자 2명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김현희가 북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기자는 김현희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형 검사는 당혹스러웠다.
“기자님, 김현희가 외모나 한국어 능력을 볼 때 한민족이라는 건 인정하겠습니까?”
이상형 검사가 기자에게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매 시간 별로 김현희 얼굴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고 있는데 만일 김현희가 남한 사람이면 누군가, 어느 오지에서라도 아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자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김현희는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변호인들과는 몇 차례 서울 시내에 있는 모처에서 만났다. 이때 변호인들은 수사관이 참석하지 않고 김현희와 단독으로 만나 면담할 것을 요청했다.
“좋습니다.”
안기부는 변호인들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김현희는 두 변호사가 자기를 위해 변호를 해준다는 데 고마움을 느끼며 남한에서 만난 사람들 중 특히 두 사람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에 안동일 변호사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맡은 이 사건이 조작으로 몰리는데 대해 <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라는 책을 펴내 누구보다도 강력히 김현희야말로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이며 KAL기 폭파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증언했다.
정재헌 변호사는 가수 조용필의 이혼관련 변호를 했는데 김현희에게 조용필이 사인한 카세트테이프를 갖다 주어 김현희가 매우 좋아했다. 김현희도 남한에 와서 가요를 많이 들었는데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여 노래방에 가면 <친구여>를 곧잘 부르곤 했다.
노래방은 1년에 한두 번 갔었다. 안가생활을 하면서 김현희나 수사관들이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했고 김현희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김현희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서울의 종’, ‘친구여’, ‘사랑의 미로’ 등이었다. 한 번은 자기가 아는 노래가 다 떨어졌는지 노래책을 뒤적이면서 보다가 ‘백도라지’라는 민요제목을 보고는 북한 말투로 “여기 백도라지는 어떤가?”해서 수사관들이 웃음보를 터뜨린 적이 있다.
변호인들이 김현희에 대해 단독면담을 요청한 것은 그들도 김현희 조작설 관련 의혹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변호를 하기 위해 김현희를 면담하면서 그들은 KAL기 폭파범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그들은 김현희를 집으로 초대하여 남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89년 3월 7일 1심 첫 재판이 있었다. 나는 김현희가 법정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하였다. 수수한 감색 체크무늬의 점퍼와 카키색 면바지였다. 김현희는 전 날 잠을 설쳤는지 얼굴도 부석부석하였다. 나도 부석부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법원에 들어서면 분명 많은 언론사에서 와서 촬영을 하고 사진을 찍을 텐데 또 얼굴이 노출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전날 단골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모양을 업스타일로 하고 자느라고 잠을 설쳤다.
재판 날 아침 여러 명의 수사관들과 두 명의 여수사관, 의무실 의사, 간호사 등 많은 인원이 함께 법정으로 출발하였다. 김현희와 나는 스텔라 승용차에 탔다. 긴장한 탓인지 춘삼월의 아침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서소문 길로 들어서서 조금 가자 앞에 법원 문이 보였다. 그 앞에는 이미 언론사 차량과 경찰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대법정 앞에는 KAL기 유가족 30여명이 몰려와 ‘살인범 김현희를 공개 재판하여 처형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