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9년 9월9일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구속되면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 ||
지난 10월27일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지난 98~99년 사이에 벌어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정 후보가 관여됐다”고 폭탄발언을 했다.그가 기자회견을 통해 이 같은 폭로를 한 것은 “대선 후보로 나선 정몽준 국민통합21 의원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 전 회장의 이 발언으로 정몽준 의원은 물론 정·재계가 온통 술렁이고 있다.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통합21은 서로의 이해에 따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다. 이익치 전 회장의 발언이 대선정가를 아연 긴장시키고 있는 것은 그가 현대가의 가신그룹 중 누구보다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현정부 출범 이후 정부-현대의 밀월관계를 주도한 인사였고, 핵심에 있었다. 때문에 그가 입을 열 경우 정치권뿐 아니라 재계도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릴 공산이 큰 게 사실이다.이미 그는 도쿄에서 정몽준 의원 검증론을 주장하면서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을 폭로해 자신의 폭발력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의 입에 정가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향후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대선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 거취를 정하겠다”는 뒷말을 남겨 앞으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상당부분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과연 그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꽁꽁 묻어두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 것인가. 이익치 X파일에 담긴 일급비밀은 무엇일까.
이 전 회장이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한 내용을 폭로한 이후 정가와 금융계, 그리고 재계 인사들이 이 전 회장의 동향을 체크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의 또다른 폭로가 가져올 충격파를 예감한 때문인 듯하다.
과거 현대 구조조정본부에 몸담았던 고위인사는 <일요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예회장의 최측근이었고, 현대그룹의 마지막 몰락을 지켜본 인물이다. 그가 입을 연다는 것은 불행이다.”
1.MJ 출생의 비밀까지도?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가진 최대 비밀은 현대가 오너 일가의 비밀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던 1969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2000년 9월 현대증권 회장을 끝으로 현대를 떠나기까지 30년을 현대그룹 핵심부에서 일했다.특히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작고하기 5년 전이던 1996년부터는 그룹의 핵심조직이던 종합기획실에서 박세용 사장과 함께 정 명예회장의 핵심 가신으로 활약했다.
정몽구-정몽헌 회장의 ‘왕자의 난’, 현대증권 바이코리아 침몰 과정, 현대건설 내부 비밀, 정 명예회장의 개인문제, 현 정부와 현대그룹의 밀월관계의 시작과 끝 등 그의 파일은 가공할 위력이 있다.또 이 전 회장은 현대가 2세들의 개인신상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직접 옆에서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한동안 세간의 관심사였던 정몽준 회장의 출생과 관련한 여러가지 얘기들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상당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해두었다는 주변의 전언도 있다.또 2000년 당시 자신이 그룹에서 쫓겨나는데 결정적인 사건이 됐던 정몽구-몽헌 형제의 왕자의 난을 둘러싼 내막도 털어놓을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도 왕자의 난이 왜 현대그룹의 몰락으로 이어졌는지, 이 사건이 왜 현대그룹의 침몰시키는 결정적인 변수가 됐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동안 현대그룹 채권단에서 왜 오너 경영인보다는 집중적으로 가신그룹(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 등)의 퇴진을 요구했는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이 전 회장이 이 같은 오너 일가의 비밀을 폭로하고 나선다면, 대선후보로 나선 정몽준 의원에게 자칫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이번에 그가 폭로한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은 그가 가진 오너 일가의 비파일 중 가장 영양가 없는 내용 중 하나라는 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전언이다.
이익치 전 회장은 지난 96년 2월부터 현대그룹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 모임인 7인운영위원회 운영위원으로 몸담으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최측근 가신으로 활약했다.
당시 그는 현대증권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재직중이었으며, 증권업무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그는 채권투자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 정 명예회장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정 명예회장의 최측근 중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이 있었지만, 사실상 재무적인 문제는 이 전 회장이 정 명예회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모두 핸들링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북사업 플랜도 상당부분 이 전 회장의 머리로 짜냈다는 게 정설이다.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대북사업 플랜을 잘 알고 있었고,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당시 현대그룹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전언이다. 사실 이 전 회장은 2000년 하반기에 미국으로 출국한 이후 장기 체류하면서 금강산사업 투자유치를 위해 발벗고 뛰었다.
본인이나, 정몽헌 회장측은 부인하고는 있지만 그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라스베이거스 등을 오가며 투자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특히 그는 정 명예회장 생전에 수차례 북한을 다녀왔고, 지난 연말에는 금강산에서 대북사업 관련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북사업과 관련해 현재 정·재계의 핫이슈로 떠오른 ‘현대상선 자금 대북지원설’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그가 알고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물론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아는 바 없다”고 입을 다물긴 했다.
3. 재무를 알면 모든 걸 안다
1998년 재계를 놀라게 했던 현대전자와 LG반도체 빅딜 합병의 숨은 비화도 그가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정, 재계 관계자들은 추측하고 있다.그 이유는 당시 이 전 회장은 종합기획실에 근무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현대그룹의 재무를 주무르고 있었고, 현대증권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
이 빅딜은 현정부가 집권 초기에 깊숙이 관여했던 경제사건 중 가장 큰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실 지금까지 이 빅딜은 많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 게 사실이다.당시 현 정부는 빅딜이 성공했다고 주장했지만, 공룡 부실기업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이 많다. 실제로 지금은 하이닉스로 이름을 바꾼 현대전자 문제는 거듭된 외자유치 실패로 몰락 직전에 직면해 결과적으로 실패한 딜이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전 회장이 빅딜과 관련한 초특급 비밀을 폭로한다면 정·재계를 다시 한 번 충격속에 몰아넣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현대투신 사건’도 이 전 회장의 손아귀에 있다. 현대투신 사건은 지난 98년 현대투신이 국민투신을 합병하면서 생긴 거대한 부실로 인해 침몰하게 된 사건이다.
특히 현대투신은 이 전 회장이 주도한 바이코리아펀드의 운용을 통해 부실이 발생했고, 결국 이 사건은 시중은행 세 곳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게다가 이 펀드는 당시 부실징후가 뚜렷했던 현대전자 등 계열사 지원에 사용된 것이 나중에 드러나 많은 의혹을 남겼다.
특히 이 사건은 펀드 운용에 따른 수익금의 상당부분이 전용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부분이다. 이 돈이 정치권으로 유입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핵심이지만 누구도 그와 관련해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때문에 지금도 베일속에 가려진 현대투신 사태와 관련해 그가 입을 연다면 현정부의 경제정책 핵심 관료 중 상당수가 이 문제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있다는 게 금융 전문가들이 전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