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 제766조 청구권 시효 놓고 가해자 ‘법원 판결 후 3년’ vs 피해자 ‘병원 진단 후 3년’ 충돌
독자 여러분이 시민 배심원단의 배심원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최종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우선 해당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20대 여성 모델 A 씨와 20대 남성 대학생 B 씨는 2015년 9월부터 2017년 4월까지 교제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B 씨는 2017년 2월부터 4월까지 항거불능 상태인 A 씨를 강제 추행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B 씨의 불법행위는 준강제추행, 성폭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촬영), 폭행 등이었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B 씨는 2017년 2월 말 저녁 10시경 서울에 있는 A 씨 집에서 수면제와 항불안제를 복용하고 잠들어 항거불능 상태에 빠진 A 씨를 강제 추행했다. 한 달 뒤인 3월 말엔 A 씨가 집에서 잠자고 있을 때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해 A 씨 가슴을 여러 차례 촬영했다.
폭행 혐의도 가중됐다. B 씨는 2017년 4월 말 오후 3시경 A 씨 집에서 A 씨가 B 씨의 이 같은 불법행위에 대한 정신적 치료비 등 지급과 관련해 공증을 얘기하자 화가 나 양손으로 A 씨 몸을 잡고 들었다가 바닥에 내리찍었다. 또한 멱살을 잡고 A 씨를 여러 차례 흔들었으며 손바닥으로 A 씨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이에 법원은 2017년 12월 피고인 B 씨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B 씨는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법원은 또 80시간 사회봉사와 40시간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을 명했다. 법원은 이 사건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판결을 확정했다. 결국 B 씨 행위가 불법으로 판정 난 셈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B 씨 측 변호인은 "B 씨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충분한 법적 조력과 여러 상황들에 대한 검토 없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A 씨와의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하려고 했다. B 씨는 억울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A 씨가 주장하는 범죄 사실에 대해 그 어떠한 증거 제출과 반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죄를 인정하며 처벌을 받게 됐던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이로 인해 가해자 B 씨는 피해자 A 씨가 입은 손해를 직접 배상할 책임도 생겼다. 대법원 판례가 그렇다. 그렇다면 B 씨의 손해배상 책임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우선 병원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A 씨는 이 사건이 발생한 2017년 2월부터 현재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A 씨 측 변호인은 “A 씨가 진료비 등을 자비로 냈기 때문에 상당한 금액의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도 손해가 계속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정신적 위자료도 손해배상 책임 범위에 들어간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A 씨 측은 “B 씨는 이 사건 범행 이후 항의하는 A 씨에게 오히려 모욕적인 문자를 보내는 등 조롱했다”며 “A 씨는 악몽과 불안, 분노, 우울증 등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술에 의존하는 등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지 막막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A 씨는 B 씨에게 병원 치료비로 280만 원, 위자료로 5000만 원 등 모두 5280만 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2022년 4월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3월 A 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이 손해배상 소송 1심 재판부는 B 씨의 A 씨에 대한 불법행위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했다. 하지만 A 씨의 B 씨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 기산점(시작 시점)을 성폭력 사건 1심 선고일인 2017년 12월이라고 판시했다. A 씨가 2017년 12월부터 3년 이내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어야 하는데 그 기간이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A 씨는 성폭력 사건 1심 선고일로부터 4년 6개월 경과한 2022년 4월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1심 재판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A 씨)가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해 소멸한다’는 민법 제766조 제1항을 인용했다.
이에 대해 A 씨는 지난 4월 항소했다. A 씨 측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이 사실 오인과 법리 오해의 위배가 있다”고 반박한다. 성범죄는 피해자 나이, 환경, 피해 정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자 개인 성향 등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범죄, 전쟁, 자연재해 등 심각한 외상을 경험한 후에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 반응이다. 보통 외상 후 짧게는 일주일에서 3개월 이내에 증상이 나타난다. 길게는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30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정신병리학계 전문가는 “성범죄 직후 일부 증상들이 발생하더라도 당시엔 증상이 앞으로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그것이 고착화돼 질환으로 진단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법원은 성범죄로 인한 정신 질환에 대한 손해배상 재판에 상당히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A 씨 측은 “A 씨는 B 씨 범행으로 인해 불안과 수면 장애 등 일부 증상이 발생했다. 이 같은 증상들이 고착화돼 질환으로 진단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말한다. 특히 A 씨는 B 씨의 불법촬영 트라우마로 공중화장실을 전혀 이용하지 못해 방광염에 걸렸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 ‘데이트 폭력’ ‘몰카’ 등을 접하면 극도로 공포심을 느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복용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수시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 씨 측은 범죄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2019년 6월 서울의 대형종합병원에서 우울증 진단과 함께 알코올 남용, 상세불명의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이에 A 씨 측은 이 사건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 기산일을 A 씨가 병원에서 우울증 등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때인 2019년 6월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소송을 제기한 2022년 4월에도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멸시효인 3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A 씨 측은 “1심 판결일(2017년 12월) 이후에도 B 씨가 A 씨와 함께 만나던 친구들에게 A 씨를 꽃뱀으로 몰아세워 친구관계가 단절됐다”고 주장한다. 또한 A 씨가 일하는 모델 업계에 소문이 퍼져 다른 에이전시를 구하지 못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도 심각해졌다는 게 A 씨 주장이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A 씨 측은 “이 사건 손해배상채권은 B 씨의 불법행위 당시엔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손해가 발생하거나 예상 외로 손해가 확대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B 씨는 A 씨가 2022년 4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후 “A 씨가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A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B 씨의 고소 사건은 경찰과 검찰에서 각각 ‘불송치’ ‘죄가 안 됨’ 처분을 받았다. A 씨 측은 “A 씨가 수사기관 조사를 받을 때 또다시 악몽 같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서 진술했다”고 했다. 급기야 2022년 11월엔 흉기로 손목을 자해해 병원 응급실 치료를 받기도 했다.
A 씨는 손해배상 소송 1심 판결일인 지난 3월 패소한 사실을 알고 인스타그램에 자살 암시 글을 올린 후 약물을 복용, 음독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지인의 신고로 119가 출동해 응급실 치료를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연달아 음독자살을 시도했다는 전언.
이 사건과 관련해 B 씨 측은 "A 씨는 B 씨가 자백해 형사확정판결이 내려진 범죄사실을 빌미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 내내 거짓으로 일관해 자신의 피해를 확대해 주장하고 있다. B 씨를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으로 내몰아 자신에게 유리한 소송 결과를 도출하려는 모습을 줄곧 보여왔다"며 "A 씨가 형사확정판결 피해자라 하더라도 이를 빌미로 객관적 진실에서 벗어난 허황되고 거짓된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A 씨 주장은 A 씨의 손해배상 청구 인용 여부와 상관없는 주장으로 배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B 씨는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재학 중이던 대학교에서 정학 징계 처분을 받기도 했다. B 씨 측은 "A 씨에 대한 B 씨의 불법행위책임이 인정되더라도 A 씨의 위자료와 직접 치료비는 단기소멸시효가 완성돼 더 이상 청구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