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부터 삐끗…“박근혜한테 갖다 바쳐라”
▲ 모바일 투표 오류 봉합 후 열린 제주 경선에서 후보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당직자의 얘기를 듣고 있다. 왼쪽부터 문재인ㆍ손학규ㆍ김두관ㆍ정세균 후보. 연합뉴스 |
민주통합당(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두 번째 지역순회 경선이 실시된 지난 8월 26일 오후 울산 종하체육관. 이날 경선이 2시간가량 지연된 것도 모자라 후보들의 연설 없이 곧바로 대의원 투표가 진행된다는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이처럼 격앙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새누리당 텃밭에서 더운 날씨를 무릅쓰고 경선장에 찾아와 묵묵히 기다렸던 대의원들과 지지자들이 일부 후보들의 파행 경선이 기정사실화되자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전날 제주 경선 이후 불공정 경선 논란이 불거지는 바람에 울산으로 이동할지, 서울로 돌아갈지를 두고 혼선을 빚었던 민주당 출입기자들도 혀를 찼다. 대선 승리를 이끌 장수를 뽑는 대선후보 경선이 불과 하루 만에 파행을 겪게 된 상황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기자들, 그 주변의 당직자들 입에선 “민주당이 이렇게 끝나는 거냐”는 탄식이 쏟아졌다.
총 13회의 지역순회 경선 중 고작 첫 경선만 마무리한 상황에서 마치 대선에서 패한 것처럼 극단적인 반응이 나온 데에는 민주당이 ‘마지막 기회’마저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말 것 같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이는 경선 파행이 최근 민주당과 지지층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대선 비관론에 기름을 부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다.
실제로 자체 대선후보를 확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민주당 안팎의 인사들 사이에 “이대로는 어렵다”는 우울한 전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대선후보 경선 흥행 → 민주당 대선후보 지지율 상승 →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단일화 경선 승리 → 대선 승리’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집권 전략이 물거품이 되고,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은 들러리나 루저(loser)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대표적인 진보 논객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최근 한 토론회에서 “민주진보 진영 인사들은 ‘민주당 대선후보와 안철수 원장이 단일화하면 대선에서 이긴다’고 전제하고 후보단일화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조 교수는 “민주당은 혁신과 감동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안 원장은 생각이 있는데 행동이 없고, 영향력은 있는데 정치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현주소와 주변 환경을 살펴보면 이 같은 우려를 단지 비관론자들의 기우로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단적으로 대선후보 경선이 전혀 흥행에 성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경선 선거인단 목표치는 한때 300만 명에 달했지만 200만, 150만 순으로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흥행 대박’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선거인단 모집도 당초 기대를 밑돌았지만 투표율도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당대표 경선, 국회의원 경선 때에도 80% 선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모바일 선거인단 투표율은 이번엔 60% 선을 지켜내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더욱이 대선후보 경선이 초반부터 문재인 후보의 독주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극적인 요소마저 줄어들었다.
흥행이 없다 보니 민주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종 여론조사(다자대결)에서 박근혜 후보가 30%대 중후반, 안철수 원장이 20%대 중후반의 지지율을 보이는 것과 달리 민주당 후보들은 참담한 수준이다. 문재인 후보만이 10%대 초반의 지지율을 보이는 반면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는 기껏해야 4%에도 못 미치고 있다.
민주당 후보들이 조연처럼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려 있는 사이 안철수 원장은 다시 야권 지지층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책 출간과 예능프로그램 출연 외에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지도 않고, 더구나 아직껏 대선 출마 여부조차 밝히지 않은 안 원장이다. 다분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의식해 조용한 행보를 이어가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민주당 대선후보가 정해지고 안 원장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할 경우, 민주당 후보가 안 원장을 따라잡을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박지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내 인사들이 저축은행 사건, 공천헌금 사건 등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것도 민주당의 대선 전망을 어둡게 보게 하는 요인이다. 민주당은 “정치검찰의 야당 탄압”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정권 심판론과 각종 개혁 공약 등 대선에서 사용해야 할 민주당의 칼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 내부 인사든, 외부 전문가든 민주당이 이 같은 비관적 전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탈출구는 현재 진행 중인 대선후보 경선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해찬 대표 - 박지원 원내대표 체제’는 이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만큼 대선후보 경선을 잘 치르고 확정된 후보 중심으로 당의 구심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한 인사는 “여러 명의 후보가 있는 현 상황과 대선후보가 확정된 상황은 전혀 다를 것”이라며 “아직 절망을 말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경선 후유증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민주당 대선후보가 확정될 경우 야권 지지층은 제1야당 후보와 무소속 후보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며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에게 지지율 면에서 크게 뒤지다가 결국 역전에 성공한 것처럼 이번에도 역전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경선 와중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 온 서울 지역 한 중진 의원은 “대선후보를 뽑은 뒤 민주당이 후보 중심으로 단합하느냐, 아니면 또 정파로 나뉘어 치고받고 싸우느냐에 따라 그 뒤의 결과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안 원장에게 패하는 것도 민주당에겐 사실상 ‘사망선고’”라며 “대선후보 중심으로 뭉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다 죽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
▲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불거진 이해찬 박지원 담합 논란이 아직까지도 당의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이게 다 ‘이-박 담합’ 때문?
“이해찬 대표도, 박지원 원내대표도 자신들의 ‘이-박 담합’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큰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민주통합당(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불공정 경선 관리 논란’ 속에 파행을 겪고 경선 후보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비노(비노무현) 성향의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월 4일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불거졌던 ‘이-박 담합’ 논란이 원내대표 경선과 6월 9일 당대표 경선 분위기를 망쳐놓은 데 그치지 않고 결국 대선후보 경선에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이 의원은 “이런 분위기에서 대선후보를 뽑아봐야 어떻게 당이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어떻게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박근혜(새누리당 대선후보)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이전투구 양상으로 빠져들면서 이처럼 ‘이-박 담합’이 다시 한 번 질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박 담합’으로 인해 민주당이 친노(친노무현) 대 비노의 대결 프레임에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버렸고, 이 때문에 대선 전망도 어두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당사자들은 “정권교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이-박 담합’은 민주당에 ‘꺼지지 않는 불신의 씨앗’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박 담합’ 논란이 불거진 후 민주당은 바람 잘 날 없을 정도로 내홍에 시달렸다.
그 시작은 원내대표 경선이었다. 지난 4ㆍ11 국회의원 총선거 패배 후 민주당은 하루 빨리 전열을 정비해 총선 과정에서 확인됐던 정권 심판론을 보다 확산시키는 데 주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박 담합’ 사실, 더구나 그 와중에 대선주자 중 한 명인 문재인 상임고문이 개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은 다시 한 번 친노와 비노로 양분됐다. 지난해 민주당 창당을 통해 이뤄냈던 통합의 효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가 원내사령탑을 맡아 대여 투쟁을 이끌 것인가는 뒷전으로 밀렸고 경선 기간 내내 ‘이-박 단합’이냐 ‘이-박 담합’이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결국 당내 최대 계파인 친노그룹과 호남의 연합 후보로 나선 박지원 후보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굴욕 끝에 7표차로 신승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당대표 경선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대선 승리와 정권 교체를 위한 비전, 전략을 놓고 겨뤄야 할 당대표 경선이 친노 대 비노의 극심한 정파대결로 흘렀다. 김한길 후보가 ‘이-박 담합’을 “패권주의적 발상”이라고 강하게 치고나오면서 당초 낙승을 예상했던 이해찬 후보는 13회의 지역순회 경선 중 10곳에서 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후보는 모바일 투표를 통해 간신히 대표에 당선됐지만 이미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은 채였다.
‘이해찬 대표 - 박지원 원내대표 체제’가 완성되자 민주당 내에선 “경위야 어찌 됐든 이제 강력한 지도부를 중심으로 대선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며 안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여 만에 이는 희망사항에 불과했음이 입증됐다.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 문재인 후보를 따라잡아야 하는 후보들이 당의 선거관리를 문제 삼고 나온 것이다. 특히 첫 지역순회 경선이었던 8월 25일 제주 경선에서 문 후보가 저조한 투표율 속에 압승을 거두자 비문(비문재인) 후보들은 “경선 룰을 만들 때부터 당 지도부가 우리 의견은 무시하고 문 후보 편을 들더니 특정 세력(친노)이 민심으로 위장해 ‘당심’을 왜곡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자신들의 지지표가 상당수 무효표로 처리됐다던 손, 김 후보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공정 경선 논란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비노그룹에 속하는 한 인사는 “비문 후보들은 ‘이-박 담합’이 결국 ‘문재인 대선후보’를 상정한 시나리오로 보고 있다”며 “경선관리가 공정하게 이뤄지더라도 그들을 설득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인사는 “대선에서 패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대선후보가 안철수 원장과의 단일화 경선에서 패하더라도 이 대표와 박 원내대표는 ‘공적’으로 몰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