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왜 말을 못할까
▲ 박근혜 후보가 3일 한양대에서 열린 잡페스티벌 현장을 찾아 대학생들과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
무엇보다 이번 인혁당 발언이 심각한 것은 박근혜 후보가 전향된 역사인식을 보여주지 못하고 유신 등의 과거사에 대한 ‘옹호’와 변명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과거사의 덫에 걸렸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박 후보의 변명-여론의 반발’ 악순환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커 이 문제가 2012 대선에서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국민들의 눈높이와 상식 속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지적이 그에게는 뼈아픈 대목이다.
한때 친박계의 핵심측근이었던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도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역사인식 논란에 대해 “본인(박 후보) 생각을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정리해야 한다. 박 후보가 이런 문제의 틀에 갇히면 대선이 굉장히 위험해지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입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고,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최근 펴낸 <박근혜 스타일 2012>(예옥 간)에서 “‘나는 아버지와 같지 않다’고 말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유권자는 이걸 보고 혹시, 세상이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이런 인식이 심화되면 유신에 대한 논란까지 점화될 것이고, 이는 박근혜 후보에게 위협적인 아킬레스 건이 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박 후보는 여론에 떠밀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마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현 정국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에 굴복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친박계 참모들도 과거사 문제만은 박 후보가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강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친박계 내부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역사인식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건 아버지와 딸이라는 특수한 관계가 있다. 그걸 좀 이해해 달라”는 기류가 강하다.
▲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 후보. |
사실 박근혜 후보에게 지난 한 달은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8월 20일 당내 경선이 끝나고 민생을 챙기는 모습과 함께 ‘국민대통합’ 행보에 나서며 호응을 얻은 반면 민주통합당은 경선 룰 갈등으로, 안철수 원장은 거듭되는 검증 시리즈로 유권자들에게 피로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박 후보의 캠프 관계자들은 “앞으로 안철수 원장에 대한 검증의 강도가 높아지면 박 후보의 지지율이 다자대결에서도 50%에 근접하게 될 것”이라 자신하기도 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위원장 안대희)는 친인척 및 측근비리에 관한 강도 높은 근절대책을 발표하면서 여론의 호응을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들이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이 알려지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난 6일 ‘안철수 원장 불출마 종용’에 관한 금태섭 변호사의 기자회견보다 더 큰 파장이라는 분석이 많다. 추석 전까지 국면전환용 카드를 내밀지 못할 경우 콘크리트 지지율마저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2004년 8월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당시 가진 연찬회에서도 인혁당에 관해 “법적으로 전부 결론 난 사항들”이라고 일축한 바 있어 그동안 인식의 변화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SNS에서는 5·16 군사정변에 관한 후보의 판단에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 존재했던 반면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만큼은 성토의 글이 압도적이다.
고종석 칼럼니스트는 “인혁당 희생자 가운데 한 분인 하재완 선생은 고문을 받다 내장이 튀어나왔다. 옆방에 갇혀 있던 시인 김지하의 증언이다. 죽여도 곱게 죽인 게 아니다. 왜 서둘러 사형집행하고 화장해버렸을까? 끔찍한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라며 비판에 동참했다.
결국 박 후보는 발언 3일 만인 지난 13일 사과의 뜻을 밝히고 “유가족들이 원할 경우 직접 만나겠다”고 전하면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가 터진 뒤 쫓아가며 해결하는 식의 뒷북 대응은 한계가 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결국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 문제 등을 민심이 인정하는 수준에까지 맞춰 전향적으로 해결하고,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선제적’으로 단행했어야 과거사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 관계자는 “젊은 세대들은 인혁당 사건에 관해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알더라도 여론조사에 잡히지 않는 무당파가 많아 지지율 조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40대 이상 상식적 중도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이 등을 돌릴 수 있어 조기에 수습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박근혜 후보가 과거사의 덫에 걸렸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 박 후보가 지금의 역사인식에서 진일보한 생각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영원히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 2005년 12월 7일 국정원 과거사위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혁신 계열 인사들의 서클 수준의 모임”이라는 게 골자였다. 일요신문DB |
“고문으로 인한 조작” 이미 결론났는데…
대권의 7부 능선에 있는 박근혜 후보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인혁당 사건은 과연 무엇일까. 정확히는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인혁당 사건이 아닌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말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을 당시 국내에서는 김대중 납치사건(73년 8월)으로 인해 반정부 성향이 강해지면서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백만인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정부는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재야인사들은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됐는데 이때 고 장준하 선생도 포함됐다.
74년 3월, 대학생들은 신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그러던 중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 바로 지난 1964년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전복을 시도했던 인민혁명당을 재건하려는 세력이다”라고 발표하고 관련자 23명을 구속기소했다. 이 가운데 8명은 75년 4월 사형 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2000년 출범한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 의문사진상위는 인혁당 재건위라는 명칭 자체를 중앙정보부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밝혔다. 민청학련으로 검거된 이들은 대부분 ‘혁신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반 정권 운동을 전개했고 기소된 이들 대부분이 인민혁명당 재건위라는 용어를 재판 과정에서 처음 접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가담자 가운데 1차 인혁당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을 무리하게 연결시켰던 것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전직 법무관은 “당시 인혁당 사건 자료는 모두 계룡대 육군본부 창고에 있었다. 의문사진상위는 자료를 확보한 이후 용공조작사건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라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자료에는 수사 지침과 함께 시위에 사용되던 돈을 ‘지하혁명을 위한 공작금으로 표현하라’는 언론 지침까지 적혀있었다”라고 전했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2007년 1월, 사건 발생 33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 후보가 언급한 ‘두 개의 판결’이란 75년 사형 판결과 2007년 재심청구 이후의 무죄 판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박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사형과 무죄 판결이 엇갈리는 만큼 역사적 판단에 맡기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법체계를 무시하는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다.
한편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관해 “새로운 증언이 있다”라는 밝힌 것은 대부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아닌 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관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범진 전 의원의 증언인데 박 전 의원은 지난 2010년 “나 자신이 인혁당에 입당해서 활동했었다.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을 봤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른손을 들고 입당선서를 한 뒤 참여했다”라고 밝혔다. 서울대 안병직 명예교수 역시 “인혁당은 용공조작이 아니었다”며 관련 서적을 출판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을 대변한 김형태 변호사는 “이들이 인혁당 사건에 관해 알 만한 위치에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단순히 지난 정권에서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와서도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 재심 및 손해배상 청구는 줄줄이 무죄판결을 받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