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민권 시험에 역사ㆍ철학 문제가,헉!
▲ 아이를 안은 아프가니스탄 망명자가 폭동진압을 위해 출동한 그리스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유럽은 지금 이런 물음들에 직면하고 있다. 재정 위기가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민자 정책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들끓고 있다. 최근 다국적 여론조사업체 ‘유거브(YouGov)’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인 중 41%는 모든 이민을 금지하는 정책을 내건 정당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민자 제한 정책을 반대하는 정당을 지지한다는 여론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일종의 ‘극우 바람’이 유럽에 불고 있다.
유럽 정상들마저 나서서 다문화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은 유럽연합(EU) 정상들이 모인 공식 자리에서 “유럽은 다문화 주의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다”고 선언했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지난해 국제안보회의에서 “과거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주던 다문화 정책은 접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최근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영화 <무슬림의 순진함(Innocence of Muslims)>이 미국에서 제작돼 반미 시위가 중동 등에서 일어났지만, 사실 반이슬람주의 또는 백인우월주의도 유럽이 진원지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는 유럽의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지난 몇 년 간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 그 망령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준다.
▲ 무슬림 혐오를 외치며 총기를 난사한 브레이비크. |
독일에선 지난해 신나치 테러조직의 3인조가 11년간 외국인 등을 연쇄 살해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명 ‘국가사회주의지하’(NSU)를 자처한 남성 2명과 여성 1명은 2000년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터키인 8명을 포함 총 10명을 살해했다. 지난해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도시 피렌체에서는 극우사상에 경도된 50대 남성이 백주대낮 광장에서 아프리카 세네갈 이주노동자들을 겨냥해 총을 쏴 2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유럽에 사는 흑인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이거나 이민 2세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차별을 받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9월 16일자에 “흑인들은 멀쩡히 길을 걷다가 경찰에게 몸수색을 받는 등 인종주의적 차별이 일상화됐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경찰에게 수색을 받는 흑인의 수는 백인보다 무려 30배 정도 많다. 지난해 8월 영국 런던 빈민가에서는 일상적 몸수색 등 차별에 불만을 갖던 10대 흑인들이 주축이 돼 경찰서에 물을 지리는 등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도 이민자들, 특히 무슬림 이민자들을 자극할 만한 정책들을 유럽 국가들은 선보이고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지난해 온몸을 가리는 이슬람 여성 전통의상 부르카 착용을 금지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도 현재 비슷한 법률을 준비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2009년 11월 국민투표로 이슬람 사원의 첨탑 건설을 금지했다. 노르웨이 신문 등도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게재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주민 거주 반대는 유럽 사회의 대세이기도 하다. 일종의 ‘극우’ 바람이 유럽을 불고 있다. 영국 정부는 지난 7월 시민권 취득 시험에서 기존의 실생활 문제에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적 문제들을 두루 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자국어가 아닌 제2국어로 그 나라의 역사 등을 공부한다는 건 해외 체류 경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장기 체류를 통한 시민권 자격을 취득하기도 어려워졌다. 정규대학·대학원을 졸업한 유학생에 한해 일을 하거나 직장을 구하라는 의미에서 발급됐던 2년짜리 체류 비자 PSW(post-study-work)도 지난 4월 폐지됐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비싼 등록금을 내며 겨우 대학을 졸업했더니 바로 내쫓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경제 위기가 이슬람을 조롱하고 이민을 제약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지만, 이주민들은 누구 때문에 호황을 누렸냐고 되받아치고 있다. ‘이민자들이 유럽의 경제 성장에 기여한다’는 게 주된 이유다. 가령 런던 북부 스위스코티지 역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서니(47)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대낮에 맥주를 마시는 등 체질적으로 게으르다. 이민자들을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나라의 내수 경제가 활성화되는 등 기여했는데, 이제와 이민자들을 쫓아내려 하는 건 어이가 없다.” 인도 출신의 이민자인 서니는 “택시 기사나 식당 종업원 중 절반 이상이 이주민”이라며 “이민자들이 모두 영국을 떠난다면 나라가 정상적으로 굴러갈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민자들에게 유럽은 아무리 미워해도 떠날 수 없는 곳이다. 보통 이민자들은 자국의 경제난과 전쟁 등을 피해 망명을 신청한다. 영국 내 전체 이주민 수는 49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리비아 등 전쟁을 겪은 국가에서 망명을 신청한 인원은 1만 9803명이다. 런던 중심가 옥스퍼드 서커스의 한 관광상점에서 일하는 마슈크 미아(54)는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민자다. “방글라데시는 무늬만 민주주의 국가이지 여전히 군부 독재 잔당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영국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한다”고 말한 미아의 심경은 거의 모든 이민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이승환 영국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