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 판매상 모집해 선입금 받고 잠적…허위로 공동구매 참가자 모아 비슷한 범행
#일까지 시키더니…보름 만에 잠적
수도권에 사는 40대 A 씨는 2023년 12월 초순 인스타그램에서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받았다. 상대방은 본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이라고 했다. 공부 목적의 언어 교환 및 단순 친교 등의 목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듯했다. A 씨는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흥미롭기도 해 그와의 소통을 2주일가량 이어 나갔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무렵 이 일본인은 프랑스 최대 유통업체 가운데 하나인 르끌레어 온라인 쇼핑몰 얘기를 꺼냈다. 본인이 부업 삼아 중간 판매상으로 일하는데 수익률이 좋다며 A 씨에게도 관심 있으면 해보라고 제안했다. 고객에 물건을 보내주고 상품 값의 약 10~20%를 수수료 수익으로 얻는 구조라고 했다.
마침 온라인 쇼핑 사업을 준비하던 A 씨는 관심이 생겼다. 의심은 조금 들었지만 우선 일본인이 가르쳐준 대로 '라인' 채팅을 통해 해외 르끌레어 담당자에 구체적인 사항을 문의했다. 수익은 일본인이 말해준 그대로였고, 고객의 불편사항이 없도록 부지런히 활동해줘야 한다는 당부가 돌아왔다.
약간 꺼림칙한 부분은 있었다. 자기 돈을 먼저 들여야 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즉 고객이 르끌레어에 주문을 넣으면, A 씨가 해당 물건을 자신의 돈으로 구입한 뒤 고객에 전달한다. 이런 과정을 마치면 회사가 10~20% 수수료를 얹어 A 씨에게 돈을 다시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사기를 의심한 지점이었으나 A 씨는 일단 한두 차례만 해보고자 마음먹었다. 세상의 여러 사기 행각을 전해 듣긴 했지만, 물건 전달 등 일까지 시켜가며 사기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례는 들은 적이 없었다. 또 온라인 쇼핑몰 창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업계를 먼저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특히 한 번이라도 사기 신고가 접수된 계좌는 이체 시 경고 메시지가 뜨지만 이곳은 달랐다. 또 홈페이지도 잘 꾸며져 있었다. 판매자로 정식 등록돼 별도로 부여 받은 페이지에는 고객 내역과 주문서 작성 및 기타 관리 등 여러 양식이 체계적으로 마련돼 있었고 이를 본사에 보고하는 시스템까지 갖춘 상태였다.
A 씨는 초반에는 약 400만 원을 벌었다. 그러나 불과 약 보름 만에 상황이 꼬였다. 물건을 고객에 전달한 뒤 출금 신청을 했는데 처리가 계속 미뤄졌다. 라인 채팅으로 르끌레어에 문의하자 '주문 처리가 늦어 고객 불만이 많다'며 '48시간 이내 처리가 되지 않은 탓에 우리 시스템 귀하의 인출 기능을 껐다'는 등의 대답이 나왔다.
사실 채팅방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대방이 번역기로 대화를 나누는 까닭인지 매우 어색한 한국어를 반복했다. 가까스로 말뜻을 해석해보면 '다른 물건들을 48시간 이내 정상처리하면 인출 기능이 다시 가동하므로 우선 주문을 받으라' '안 하면 당신 사업권을 박탈하겠다' 정도로 풀이됐다.
A 씨는 다른 주문을 처리하기에는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자 '대출을 받아 일단 상황을 모면하고 그동안 납입한 돈을 가져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약 2주 만에 A 씨와 소통해 온 담당자는 라인 채팅방에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A 씨는 60여 건의 주문을 처리하며 4000만 원의 피해를 입었다.
사기를 깨닫고 다시 보니 A 씨가 이용한 르끌레어 사이트는 이 회사 공식 홈페이지와 모양은 같았으나 다른 도메인을 쓰고 있었다. 피해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경찰은 전국 각지에서 신고를 접수 받아 수사에 돌입했다. 피의자들의 사기 혐의와 함께 국내 체류 여부 등까지 살펴볼 방침이다.
#고객도 피해자였다
이번 사건이 주목되는 이유는 더 있다. 통상적인 사기 범행은 소액으로 큰 이익을 내줄 듯 접근해 이뤄지는 경우가 흔하지만, 해당 르끌레어 사례는 피해자들에 사실상 노동까지 시켜가며 불거진 사태라 이례적이다. A 씨만 하더라도 바쁠 때는 하루 종일 주문처리 및 물건 전송에 매달렸다고 한다.
특히 르끌레어 공동구매 소비자로 나섰다가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까지 있다. 이른바 '공동구매' 사기다. 30대 여성 B 씨는 2023년 12월 SNS(소셜미디어)에서 르끌레어의 물건들을 정가보다 훨씬 싸게 살 사람을 모집한다는 글을 봤다. 여럿이 다량의 상품을 저렴한 값에 구입한 뒤 되팔면 수익이 발생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같은 공동구매 투자는 주로 부동산이나 미술품 등을 대상으로 이뤄져 왔으나, 최근에는 일반 상품으로도 진행되곤 한다. B 씨는 참가자로 선정됐다. 공동구매 모집 글을 처음 게재한 어느 낯선 투자법인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4~5명이 모인 '라인' 채팅방으로 초대됐다. 함께 공동구매에 나설 인원들이었다.
이 방에서 투자법인 관계자는 개인당 수백만~수천만 원을 투자해야 하는 상품들을 제시했다. B 씨는 예상을 훌쩍 뛰어 넘는 금액에 당황했다. 하지만 빠져 나올 수는 없었다. 그를 이끈 투자법인 관계자가 "B 씨만 빠지면 회사 차원에서 소송을 통해 나머지 팀원들의 예상 수익금 전액 배상을 청구하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팀원들마저 B 씨에 공동구매 참여와 입금을 보챘다. 결국 B 씨는 정신없이 오가는 대화 속 부담감에 시달리다 돈을 입금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돈을 더 내야 한다는 안내가 뒤따랐다. 공동구매에 따른 취득세 등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이유였다. B 씨는 이 비용까지 총 3000만 원을 냈다. 그리고 방은 사라졌다.
B 씨는 그제야 사기를 깨닫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본인을 제외한 채팅방의 모든 인원이 한통속이었다고 의심한다. B 씨 외 또 다른 르끌레어 공동구매 피해 사례에서는 '초반에는 1인당 5만 원을 투자하도록 해 실제 수익을 발생시켜 신뢰를 형성한 이후 액수를 키워 돈만 받고 잠적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이 같은 온라인 쇼핑몰 사기는 최근에 유독 심해졌다고 한다. A 씨와 같은 중간 판매나 B 씨의 공동구매 사례뿐 아니라, 주문 후 리뷰를 작성하면 구입비와 수익금을 동시에 환불해 준다는 소위 '리뷰 사기'도 심하다.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하면 알기 힘든 금융 용어를 동원해 금융감독원 신고 압박을 하기도 한다.
한국소비자원도 이 같은 실태를 파악해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다. 2023년 10월부터 올 1월까지 해외쇼핑몰 4곳과 관련한 피해상담으로 총 19건이 접수됐다. 전부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사기 피해에 노출됐으며, 대부분의 사이트가 짧은 기간 운영하다 폐쇄하는 특성이 있어 피해 해결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한국소비자원은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 등에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도 요구해둔 상태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낯선 해외 쇼핑몰은 한국소비자원에서 운영하는 국제거래 소비자 포털이나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피해 사례가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피해를 입는 과정에서 개인정보 도용 등의 가능성도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