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회당 10억원까지, 총제작비 상승 초래…업계 “작품 퀄리티 위해서라도 상한선 마련돼야”
그나마 국내외 OTT 시장이 확장되면서 방송사 외에도 다양한 플랫폼에서 작품을 선보일 수는 있게 됐지만, 이 역시 흥행이 어느 정도 보장된 제작사나 연출진, 배우가 아니라면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2019)의 성공을 기점으로 유례 없이 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K콘텐츠 산업이 국내 제작 환경 문제로 족쇄가 채워진다면 결국 국제적인 경쟁력에도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영화의 경우는 흥행 실패 여부가 확연히 드러나다 보니 대중들도 현 시장 상황을 바로 인지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 제작 현장은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부터 좀 더 심각한 위기론이 오가고 있다. 이미 지상파 3사는 물론, 종편과 케이블마저 시청률이 떨어지는 주중 드라마보다는 금·토·일 주말에 집중하는 식으로 편성을 좁히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는 현재 드라마 산업이 직면한 위기가 필연적으로 K콘텐츠의 중심축인 영상 산업의 위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특히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제작비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이면서,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으로 배우 출연료에 적절한 ‘한계선’이 그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드라마 업계 현안 간담회에 참석한 한 방송사 관계자는 “여러 협상의 과정에서 늘 생기는 문제가 연기자 출연료인데 주연은 이제 ‘억’ 소리가 아니라 회당 ‘10억’ 소리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이젠 어떤 자구책을 찾아야만 할 때가 왔다”고 짚었다. 가뜩이나 편성이 줄어들고 있는 드라마 판에서는 어느 정도 시청률이 담보 되는 ‘스타 배우’를 기용해야 그나마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 배우를 모시기 위한 경쟁이 붙으며 결국 배우의 몸값만 눈덩이처럼 불려 나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점으로 고정된 배우의 몸값은 다음 작품에서 다시 배 이상 뛰며 총제작비 상승을 견인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결국 ‘배우 중심’으로 판이 짜이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특히 로맨스 작품 같은 경우 국내에서 인기 있는 배우가 해외에서도 그대로 인기를 끄는 일이 많아 그 배우를 써야지만 해외 OTT 플랫폼으로부터 투자를 받아내는 게 상대적으로 쉬워진다”라며 “작품성을 떠나 어떤 배우를 데려오느냐에 따라 투자와 흥행이 갈리니 모든 판이 배우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톱스타들의 높은 출연료가 지적되는 것은 비단 지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20여 년 전인 2000년대 초반에도 배우들의 개런티를 놓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오갔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톱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들의 출연료가 회당 200만~300만 원 선에 머물렀으나, 갑자기 일부 인기 배우들이 회당 1000만 원에 계약이 체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불과 1~2년 사이 출연료가 5배 가까이 급등한 것.
이 시기를 기점으로 톱스타 출연료가 수천만 원을 기본으로 시작해 작품 하나가 끝날 때마다 급등하면서 지금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당시 미니시리즈 한 회당 책정된 제작비는 4500만~5000만 원 수준인데 톱스타 한 명의 출연료로만 제작비의 3분의 1을 쓰는 상황이 연출된 것.
특히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출연료가 '기본'처럼 여겨지다 보니 실제 알려진 수치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출연료로 지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총제작비의 상승 원인으로 꼽히는 배우들의 높은 출연료에 상한선이 마련돼야 제작 환경 개선은 물론, 작품의 더 높은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업계인들의 목소리가 높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 201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보다 더 ‘배우 중심’으로 모든 제작 환경이 돌아가다 보니 회당 1억 원 이상의 출연료가 기본으로 꼽히기도 했다. 중국중앙(CC)TV 등 현지 언론 매체에 따르면 지난 30년 동안 중국 배우들의 출연료는 무려 5000배 이상으로 뛰어 총제작비의 최대 50% 가까이를 차지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2018년 방영한 중국 드라마 ‘여의전’은 총제작비의 3분의 1(1억 위안, 당시 기준 약 173억 원)에 달하는 출연료가 톱스타인 두 주연 배우 저우쉰(周迅)과 훠젠화(霍建華)의 몫으로 지급됐다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처럼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출연료로 ‘배우들의 천국’이라 불린 중국 역시 2022년부터 중국 방송 규제기구인 광전총국 등 정부 기관 합동으로 배우 출연료가 전체 제작비의 40%를 넘지 못하고, 주요 배우의 출연료는 전체 출연료의 70%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출연료 제한’을 규정했다. 이전까지 배우들이 차지해 온 적지 않은 비중을 전체 제작 환경의 투자로 돌림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고 그에 합당한 수익성도 담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게 이 규제를 지지한 현지 업계의 분석이었다.
자유 시장 경제 질서와는 다소 배치되는 면이 있지만, 수익은 줄고 제작 환경도 위축되고 있는 국내 업계의 여론도 중국처럼 정부 기관 주도의 규제가 아니더라도 단체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데 모이고 있다. 또 다른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콘텐츠 제작은 결국 수익성을 지금보다 더 높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목적을 두고 있다”며 “제작과 투자가 줄고 있는 현재로서는 모험을 하기보단 안정적으로 흥행과 수익이 담보된 톱스타를 원하는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최근 해외에서의 K콘텐츠 성공을 생각하면 단순히 국내 톱배우를 기용했기 때문이 아닌, 작품성 자체만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일이 더 많았다”라며 “이런 점에서 접근한다면 작품성이 높은 작품을 중심으로 폭넓은 캐스팅을 통해 톱스타 없이도 성공하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 업계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