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얼굴’ ‘예리한 얼굴’ 공존하는 시골 형사 역…“이번에도 ‘멜로 눈알’ 지적, 로맨스 작품 해보고 싶어”
3년 전, 비밀을 간직한 조직의 보스 최무진 역으로 수많은 ‘윤지우’들을 만들어냈던 그가 이번에는 한없이 낡고 지친 시골의 ‘형사 아저씨’로 돌아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선산’에서 선산을 놓고 벌어지는 불길한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 최성준을 연기한 배우 박희순(54)의 이야기다. 멜로나 로맨스가 끼어들 수 없는 작품 속에서도 명불허전의 눈빛을 보여주는 그에게서 ‘선산’을 연출한 민홍남 감독은 성준이 감추고 있는 절절한 아픔의 그림자를 발견해내 단번에 캐스팅을 결정했다고 했다.
“바로 직전 작품인 ‘트롤리’에서 저와 함께 한 김현주 배우가 먼저 출연하기로 결정된 상황에서 제게도 대본이 왔기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원 플러스 원이라고 생각했다’ 했죠. 그런데 다분히 그런 생각이 있으셨을 거예요(웃음). 민홍남 감독님과의 첫 미팅에서 절 선택하신 이유가 뭐냐고 여쭤봤는데 이 역할이 가장 잘 맞는 배우라고 생각했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약간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요. 가족에 대한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찌든 얼굴’과, 수사할 때 적극적으로 탐문할 수 있는 ‘예리한 얼굴’이 공존하고 있다고…. 저는 그냥 들으면서 ‘그런가 보다’했죠(웃음).”
‘선산’은 존재조차 잊고 지내던 작은아버지의 죽음 후 남겨진 선산을 상속받게 된 대학교 시간강사 윤서하(김현주 분)가 불길한 일들의 연속에 휘말리고 이와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박희순이 연기한 최성준은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수사하는 극 중의 캐릭터로서 기능하는 한편, 극 밖에서는 시청자들을 위한 ‘해설역’을 자처한다. 무속 신앙 등 오컬트 소재를 뒤집어쓴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장르다 보니 시청자들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지점을 그가 대신 설명해주는 식이다. 이야기의 큰 틀 안에서는 최성준이란 인물의 개인 서사를 풀어나가는 동시에 시청자들의 길라잡이가 돼주는 셈이다.
“수사 과정을 한 단계씩 밟아가며 시청자들에게 설명해드리는 해설자 같은 기능으로 첫 번째 생각을, 두 번째로는 성준으로서의 개인적인 서사가 있기 때문에 그 서사를 풀어나가는 또 다른 기능으로 접근해서 연기했어요. 전개에 따라 이 사건의 수사는 한 단계씩 밟아서 풀어져 가는 단계라면, 상민과 성준의 관계는 도리어 점점 꼬여서 갈등이 폭발하게 돼요. 이렇게 반대로 하나는 풀리고 하나는 엉키는 게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성준이 형사로서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의 모습을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성준의 개인적인 서사는 가족을 다루는 ‘선산’ 안에서 윤서하의 서사와 함께 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룬다. 성준과 서하 모두 가족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는 닮은 점이 있고, 특히 성준은 자신과 깊은 갈등을 빚은 아들의 잘못된 복수로 가장 절친한 후배인 박상민(박병은 분)의 미래를 그르쳤다는 죄책감을 가진 인물이다. 가족 안에서 발생한 애증이 주변으로까지 옮겨지면서 최악의 결과를 낳았지만 성준은 어느 것에도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선산의 수사에만 매달리게 된다.
“성준이 상민에게 가진 감정은 복합적이에요. 자기 아들 때문에 상민이 상처를 입게 됐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측은지심이 쌓여있죠. 서로 굉장히 친했지만, 아들과의 문제로 죄책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게 설정에도 있었고요. 그래서 사건 해결의 공을 다 상민에게 넘기는데 오히려 상민에겐 그게 열등감으로 다가오는 거죠. 그렇게 서로의 애(사랑 애, 愛)가 있던 기본 관계에서 점점 증(미워할 증, 憎)으로 변해가는 상민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그런 관계 설정이 됐던 것 같아요.”
한때 절친했던 상대에게 느끼는 깊은 애증이 그처럼 절절하게 표현된 것은 이들을 연기한 배우들 역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박병은 배우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합을 맞췄던 박희순은 그와의 관계성이 ‘로맨스’에 가까웠다는 농담을 던지면서도 실제 현장에서 본 박병은의 프로다운 모습에 대해서는 더없이 진지하게 칭찬을 이어나갔다.
“원래도 유머러스하고 농담도 많이 하는 친구예요. 저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눌 정도고요. 작품으로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됐는데 이미 자기 플랜과 연기 콘셉트를 완벽하게 짜왔더라고요. 정말 일에 있어서는 철저한 배우예요. 성준과 상민의 감정이 크게 대립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는 액션도, 감정 연기도 서로 맞춰야 할 것들이 많이 생겼는데 같이 상의를 많이 했어요. 제가 박병은 배우 방에 가서 ‘어떻게 할 거야?’ 물어보면 ‘이렇게 하면 어때?’하는 식으로 방에서 작전 회의를 굉장히 많이 했죠(웃음). 그렇게 해서 짜온 걸 현장에서 지체 없이 보여드리면 감독님이 ‘오케이’ 해주셔서 일사천리로 촬영할 수 있었어요.”
이처럼 배우들의 깊은 고민으로 완성된 성준으로서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 박희순에게 팬들은 변함없는 애정과 호응을 보내왔다. 특히 ‘마이 네임’ 이후 급격히 늘었다는 이 MZ세대 팬들에게 박희순의 첫 반응은 “큰일 났다. 이런 게(본인) 다 불량식품 같은 건데, 저 체포될 것 같다”라며 우려와 걱정을 먼저 보였지만 지금은 달관한 모습이었다. 박희순이 늘 ‘그분’이라고 부르는 아내인 배우 박예진도 먼저 나서서 “팬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며 피부과까지 데려다 준다니, 슬슬 그도 설경구에 이어 ‘지천명 아이돌’이란 수식어를 달갑게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분은 제게 ‘지천명 아이돌’ 수식어가 붙은 뒤로 항상 피부에 신경 쓰라며 팩도 해주고, 피부과도 데려다 주고, 화장품을 주기도 해요(웃음). 이제 한 3년 정도 되니까 저도 어린 팬들이 많아진 걸 어느 정도 받아들였어요. 제 팬들 중에 중학생들이나 초등학생들도 있더라고요. 제 작품을 어떻게 보고 좋아하게 되신진 모르겠지만…. 이게 제 운명이라면 그냥 받아들여야죠(웃음).”
주로 형사나 폭력조직의 보스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연기한 장르물 작품들이 대중의 사랑을 먼저 받아 그런 이미지가 굳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박희순은 휴머니즘이 진한 드라마나 멜로, 코미디에서도 얼마든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배우다. 그런 만큼 좀 더 다양한 장르에서 박희순의 연기를 만끽하고 싶다는 이들의 목소리도 오래도록 높아지고 있다. 여전히 ‘멜로’에 대한 갈증이 강하다며 웃음을 터뜨린 박희순은 현재 차기작을 고르고 있는 단계라고 귀띔했다. 2024년 작품에선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모이는 이유다.
“저보고 ‘멜로 눈알’이라고 뭐라 하시면서 정작 멜로는 왜 안 주시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멜로 장르도 하고 싶고, 휴먼 드라마나 코미디도 하고 싶어요. 제가 안 해본 장르가 너무 많거든요. 제게 기대하시는 이미지가 굳어지다 보니 오히려 저예산 영화도 하면서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제 나름대로 무던히 노력했는데, 대중에게 알려지거나 소위 회자되는 것들은 제가 (대중들이 원하는) 강한 이미지로 나오는 작품들이 많더라고요. 그전에는 코미디도 했었는데(웃음)…. 그래도 부담감은 없어요.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걸 다 피하다 보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요. 부딪혀야죠, 그래도 장르물로 먹고 살았는데(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