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저금리 시기 쏠쏠한 수익에 판매 독려…정부 ‘대규모 손실 리스크’ 수수방관
이번 대규모 손실 사태가 발생한 홍콩 ELS는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를 말한다. H지수는 홍콩증시에 상장된 중국기업 중 50개 종목을 추려 산출하는데, H지수를 기초로 한 ELS는 통상 3년 뒤 만기가 됐을 때 가입 당시보다 H지수가 70% 아래로 떨어질 경우 하락률 만큼 손실을 보는 구조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2월 7일까지 시중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홍콩H지수 기초 ELS 상품 만기 규모는 총 9733억 원어치다. 하지만 이 가운데 고객이 돌려받은 돈은 4512억 원으로, 평균 손실률이 53.6%에 달한다.
홍콩 ELS 총 판매 잔액 19조 3000억 원 중 15조 4000억 원은 올해 만기가 도래한다. 상반기에만 10조 2000억 원의 만기를 맞는다. H지수가 반등하지 못하고 현재 흐름을 유지한다면 전체 손실액은 7조 원 안팎까지 불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처럼 손실 규모가 커지고, 금융당국까지 해당 상품 판매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내자 우리은행을 제외한 시중은행은 모든 ELS 상품 판매를 전면 중단했다. 우리은행은 문제가 된 홍콩 ELS를 제외하고 다른 지수 기초 ELS를 판매 중이다.
지난해 11월을 기준으로 국내 홍콩 ELS 가입자는 무려 15만 명이 넘는다. 전체 판매액의 약 82%가 시중은행에서 판매됐다. 이들이 대규모 손실 사태의 당사자가 될 만큼 위험성이 큰 ELS 상품에 가입서를 낸 배경은 뭘까. 가입자들은 가입 당시 해당 상품이 ‘예금 대체 상품’이었고, 비교적 안전한 상품이라는 은행 측 설명에 기대어 가입을 선택했다고 입을 모은다. 가입 은행이 1금융권에 속한 은행이어서 더욱 큰 의심이 없었다는 이들도 많다.
홍콩H지수 ELS 피해자 모임 관계자 A 씨는 “은행이 예금 대체 상품이라고 처음에 말했고, 원금 손실 가능성이 계약 서류에 적혀있긴 했지만 가입 권유 당시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손실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며 “일반 서민들이 100% 손실 날 수 있는 초고위험 상품에 동시다발적으로 누가 가입을 하겠냐”라고 토로했다. 홍콩H지수 ELS 피해자 모임 관계자 B 씨도 “2017년도에 처음 가입을 했는데 당시 은행 예적금 금리가 너무 낮아서 은행이 ELS를 추천해줬다”며 “은행에서는 지수가 내려가지 않는 한 손실이 날 일 없고, 안전하다고 해 가입을 했다”고 말했다.
증권사도, 고수익 투자 금융사도 아닌 시중은행에서 ELS 판매에 열을 올린 이유는 해당 상품 판매 시 은행이 가져가는 높은 수수료가 주요 이유다. 은행들은 주로 증권사가 설계하고 발행한 ELS를 신탁(주가연계신탁·ELT)이나 펀드(주가연계펀드·ELF) 형태로 판매해왔다. 국내 5대 은행이 2021년부터 2023년 3분기까지 ELS 판매 수수료를 통해 얻은 이익은 모두 6815억 7000만 원 규모다.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는 “ELS를 판매해서 은행들이 가져가는 수수료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기본적으로 지수만 떨어지지 않으면 금리를 더 주는 식의 논리가 쉬운 상품이라 은행들이 팔기에도 좋은 상품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이 ELS를 판매했을 때 은행 몫의 수수료는 ELT의 경우 보통 판매액의 1%, ELF는 대면과 비대면 판매액이 각각 0.9%, 0.7% 수준이다. 은행은 지난 3년간 주로 ELT 판매에 집중해왔다. 홍콩 ELS 일부 가입자들의 법률 대리인인 이정엽 법무법인 로집사 변호사는 “이자 수익이 충분하면 은행들도 ELS 같은 상품을 취급하지 않을 텐데, 저금리 상태에서는 비이자 수익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비이자수익을 내기 위한 방법이 보험이나 ELS 같은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직원들의 ELS 판매 실적을 인사평가에 높은 비중으로 반영하도록 핵심성과지표(KPI)를 설계한 것도 높은 ELS 판매 열기를 끌어올렸다는 진단도 있다.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일부 은행이 직원 핵심성과 평가에서 고위험 ELS 상품 판매 실적에 30~40% 이상 배점을 부여해 상품 판매를 부추긴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손실 사태가 일어난 이후 우리은행에서는 올해부터 ‘고령층에게 ELS를 팔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에 반영하지 않겠다’는 지침이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시중은행이 이 같은 고위험 상품을 팔고, 대규모 손실 사태로 이어진 과정에 대해 금융당국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2019년 은행권의 파생결합펀드(DLF)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을 때 금융당국은 DLF를 비롯한 파생상품을 팔지 않도록 하는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은행권의 반발에 투자자 보호를 전제로 ELS 신탁 판매를 허용했다. 당시 은행권은 DLF와 달리 ELS는 상대적으로 손실 우려가 크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결국 홍콩 H지수 ELS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함에 따라 판매 허용 권한과 관리 감독 의무를 진 금융당국이 책임론에 휩싸인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금융당국이 상시 감독을 강화하고 수시 점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며 “파생상품에 대한 암행 점검은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뿐이었다”고 꼬집었다.
한편 홍콩 ELS 상품 가입자 대부분이 국내 시중은행을 통해 가입한 만큼 앞으로 시중은행에서의 판매를 전면 금지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자연스레 제기된다. 하지만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가 강하게 버티고 서있어 현실적으로 시중은행의 판매 금지 조치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중론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의 ELS 판매 전면금지 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전면 금지 시 대면 금융거래가 편한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금융감독원 예산의 약 75%가 금융사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감독 분담금인 구조를 고려하면 은행에 대한 ELS 판매 금지 조치 등 강력 제재는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감독 분담금은 금감원이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사들에 대해 감독과 검사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걷는 돈이다. 예산 대부분을 금융사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감원 관리‧감독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의문은 항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홍콩 ELS 피해자 모임 관계자 B 씨는 “DLF 사태에 이어 홍콩 ELS 손실 사태로 다시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금감원 예산이 금융사들에게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예산을 책임지고 있는 곳에 어떻게 제재를 할 수 있겠냐”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홍콩 ELS 손실 사태와 같은 일을 다시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 고위험 상품 판매와 관련한 규정을 종합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소비자들의 신중한 주의는 더욱 필수다.
강현구 금융소비자연맹 국장은 “금융사들은 소비자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상품을 만들고, 판매사 직원들의 업무를 전문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며 “소비자들도 상품에 대한 정확한 내용과 수익 구조를 알고 가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은 더 나아가 “ELS 상품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은행 창구 판매는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소장은 “그게 어렵다면 손실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일부 소비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충분한 설명과 함께 판매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금융당국이 당초 예고한 관리 감독 강화를 실천하고, 투자자 보호 강화 조치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며 “ELS와 같은 고위험 상품들은 시중은행이 아닌 증권사에서만 판매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