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족이 변하면 ‘99%’가 따라 변한다
▲ 재벌 해체 소설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영탁 이사장을 만나 ‘재벌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에이, 소설 쓰냐”는 반응이 나올 법한 일이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의 바람이 거센 지금, 재벌 해체를 담은 소설 <벌족의 미래1, 이정구李鄭具>(미래를소유한사람들)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가 경제 관료 출신으로 KTB네트워크 회장과 한국거래소 이사장을 지낸 이영탁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이라는 점,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총괄하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탐독했다는 점에서 결코 ‘소설 나부랭이’로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지난 9월 26일 이영탁 이사장을 만나 ‘재벌의 미래’를 물었다.인터뷰를 위해 기자와 마주 앉은 이영탁 이사장은 “불과 5년 전만해도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를 표방했던 새누리당의 현재 중심 화두는 경제민주화다. 세상이 바뀌기 때문에 정책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이치”라며 “정부에 있을 때와 지금의 내 생각이 변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경제 관료 출신인데 소설을, 그것도 재벌 해체 이야기를 담아내 화제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1%와 99% 간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답을 정부나 학자들이 내놓지 않고 있다. 그 답이 <이정구>다. 1 대 99의 갈등,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 당신이 더 나쁘다고 싸워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두말없이 1%에 해당하는 벌족, 대대로 벼슬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당신들이 먼저 변해라. 양보하고 내려앉고 악수를 청하고 나누고 손해보고 때론 희생하고…. 그래야 나머지 99%도 따라서 변할 것 아니냐. 그게 답이라는 얘기다.
―소설 속 주인공, ‘이정구 삼현그룹 회장’ 같은 총수가 현실 속에서도 나올 것이라고 보나.
▲정말 그런 사람이 가까운 시일 내에 한두 명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국의 카네기, 록펠러의 예가 있다. 그들이 젊어서는 정말 개처럼 벌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벌어서 미국의 각종 독점금지법, 재벌 해체가 생긴 게 그 두 사람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자식한테 물려주는 게 아니라 다 내놓고 갔다. 정승처럼 멋있게. 모든 재벌들이 다 그렇게 해야 하느냐. 노, 그건 아니다. 한두 명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재벌가 쪽에서는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을 왜 다 내놓아야 하느냐고 항변할 법하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데, 아무리 재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하더라도 대대로 잘 먹고 잘 살면 꼴 보기 싫은 게 인간 심리다. 그런데 실제로는 탈법 편법에 연루된 경우가 많지 않은가.
―소설 속 인물들이 어디까지나 가공이라고는 하지만, 정황과 사건 전개상 특정그룹의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그런 점은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과거 비리를 캐자는 것이 아니다. 나이 일흔 주인공의 미래 이야기다. 아! 이런 사회지도층 인사가, 이런 벌족의 대표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우선 본인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지금 그 양반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첫째, 거느리고 있는 기업들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히 불안해. 둘째, 자식들한테 물려주려는데 자식들이 썩 미덥지 못해. 셋째, 나이 일흔에 좀 평범하게 인생도 정리도 좀 하고 싶은데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 사람의 진정한 고뇌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 거다. 또한 소설에서는 하늘에선 멋있게 날지만 땅에 내려오면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앨버트로스, 나그네새를 예로 들며 그 사람들에게는 그런 애로가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소설 속에서 재벌가 문제 중 세습, 특히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재벌들이 ‘이정구 회장’처럼 스스로 결단하는 건 요원해 보인다. 사회적 제도적으로 강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사람들은 강제하면 반발한다. ‘그동안 잘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지 않습니까’라며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돈 없는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해지겠다고 생각하겠지. 마찬가지로 돈의 애로를 모르고 산 사람들은 ‘돈 그거 별거 아니야. 진짜 행복은 평범한 데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결단과 결행을 못한다고 본다.
―재벌 해체와 전 재산 사회 환원이 하나의 방법이라면 다른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우선 기본적으로 국민들로부터 탈법 불법 편법 의혹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실 재벌은 지분을 조금 소유하고 이리저리 얽어서 전체를 다 자기 개인 기업처럼 운영하지 않나. 자식들을 충분히 경영수업 시켜서 능력이 검증됐을 때, 거기 걸맞은 자리를 주는 것도 말이 많을 텐데 처음부터 바로 위로 올리고 나이 마흔 전에 사장, 회장 만들고 하니 국민들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정상적인 절차 방법 따라서 그 사람의 경영능력이 인정됐을 때 줄 수도 있는 거고 소설처럼 기부할 수도 있고. 재단 만들어 기부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보면 소유권을 놓는 대신에 감독권을 쥐고 부를 영구히 놓지 않는 방법으로까지 얘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직 거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