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동안 빅리그 장신 투수 대비해 훈련…2루 돌 때도 홈런인 줄 몰랐다”
이정후는 3월 1일(한국 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솔트리버필즈 앳 토킹스틱에서 열린 MLB 시범경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 출장, 3회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솔로포로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첫 홈런을 신고했다. 처음에는 홈런인 줄 모르고 전력으로 뛰다가 심판의 홈런 콜을 보고 타구가 넘어간 줄 알았다고 한다.
이정후는 2월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시범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르며 3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는데 두 번째 시범경기에서 2루타와 홈런을 터트리며 시범경기 타율을 5할(6타수 3안타)로 끌어 올렸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훈련장은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위치한다. 거기에서 차로 15분 정도 가는 거리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프링캠프 스타디움인 솔트리버필즈 앳 토킹스틱이 자리잡고 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프링캠프지는 키움 히어로즈의 전지 훈련지로 이정후한테 익숙한 곳이지만 스타디움에서 경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정후는 첫 원정 시범경기에 선수단 버스로 이동했다.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밥 멜빈 감독한테 ‘루키’니까 원정갈 때는 버스를 이용하겠다고 먼저 말씀드렸다는 내용을 전한다. 이정후가 현재 어떤 마음가짐으로 메이저리그 시범경기를 치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이정후가 상대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선발 투수인 라인 넬슨은 지난해 첫 풀타임 시즌을 보냈고, 29경기(선발 27경기) 8승 8패 평균자책점 5.31을 기록한 애리조나의 5선발 후보다.
이정후는 1회초 첫 타석에서 라인 넬슨의 초구 94.3마일(152km/h)의 포심 패스트볼을 지켜봤다. 스트라이크를 기록한 가운데 2구째 몸쪽 낮은 89.3마일(143.7km/h)의 커터에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1루 쪽 파울 타구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이정후는 넬슨의 3구째 몸쪽 낮은 81.6마일(131.3km/h)의 커브볼을 받아쳤고, 이 타구는 우익수 제이크 맥카티의 키를 넘기는 장타가 되면서 2루에 안착했다. 이정후는 이 상황을 “삼진당하기 싫어서 스윙했던 게 잘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마르코 루시아노의 우익수 뜬공 때 3루 베이스를 밟은 이정후는 콘포토와 비야가 연속 삼진을 당하면서 득점을 올리지 못하고 3루 잔루로 마쳤다.
3회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이정후. 넬슨의 초구 94.3마일(151.8km/h)의 포심 패스트볼에 방망이를 휘둘렀고, 타구가 1루 라인선상으로 날카롭게 떨어지면서 파울이 됐다. 이정후한테 1루쪽 날카로운 파울 타구는 키움 시절부터 중요한 시그널이었다고 한다. 그런 파울 타구가 나온 이후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2, 3구 연속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골라낸 이정후는 2-1 유리한 카운트에서 4구째 94.7마일(152.4km/h)의 포심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몰리자 그대로 당겨쳐 시범경기 첫 홈런을 장식한다. 맞는 순간에는 라인드라이브성 안타를 예상했는데 공이 힘있게 계속 뻗어나가면서 우중간 외야 담장을 넘겼다. 이정후는 메이저리그 데뷔 2경기, 5타석 만에 첫 홈런을 터트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메이저리그 공식 통계 사이트인 베이스볼 서번트에 따르면 이정후의 홈런 타구 속도는 109.7마일(176.5km/h), 비거리는 418피트(127.4m), 발사각은 18도였다.
세 번째 타석인 6회 1사에선 바뀐 투수인 우완 조시 그린을 상대로 1스트라이크 후 92.6마일(149km/h)의 싱커를 건드렸다가 3루 땅볼로 물러났다. 이정후는 이후 인터뷰에서 세 번째 타석에서도 타격감이 좋았다고 말한다.
이정후는 1-2로 뒤진 6회말 수비를 앞두고 대수비로 교체되면서 이날 경기를 마무리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한테 1-2로 패했다.
경기 후 원정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이정후는 미국 취재진과 먼저 인터뷰를 소화했다. 이정후는 MLB 진출을 앞두고 지난겨울 동안 MLB의 키 큰 투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맞춤형 타격 훈련을 했다고 밝혔다. 이후 한국 취재진과도 만났는데 두 가지 형태의 인터뷰를 종합해 정리한다.
가장 먼저 시범경기 첫 홈런이 나온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정후는 “기쁘다는 생각보다 시즌 개막을 향한 과정이니까 좋은 타구를 날렸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라고 답했다.
이날 이정후가 친 홈런의 구속은 94.7마일. 한 미국 기자가 MLB와 KBO리그와의 차이점 중 하나가 투수의 구속 차이인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자 이정후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구속 차이도 있겠지만 MLB 투수들의 공 끝의 움직임이 좋다. 대부분의 투수들 신장이 큰 편이라 릴리스 포인트가 높아 공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겨울 동안 피칭머신으로 이에 대비한 훈련을 했다.”
이정후는 첫 타석에서 2루타가 나온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초구는 지켜볼 생각이었고, 2구째 치려고 컨택했는데 몸쪽에 슬라이더가 잘 들어와서 파울이 됐다. 투 스트라이크 후 삼진 먹기 싫어서 컨택하려고 했고, (방망이) 중심에 잘 맞아 타구가 멀리 갔다. 2루타 나온 공이 커브였을 것이다. 중심에 맞추려고 했다. 중심에 맞으면 타구가 멀리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정후는 홈런이 나온 상황도 재미있게 설명했다.
“홈런 치기 전 1루 쪽으로 강한 타구의 파울이 나왔는데 그 파울은 내가 타격감이 좋았을 때 나오는 유형의 파울이다. 초구 몸쪽 높은 패스트볼이 정말 좋은 코스의 공이었다. 그 공이 1루쪽 파울이 됐을 때 감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키움 선수들은 다 안다. 내가 그쪽으로 강한 파울 타구를 만들면 이후 더 좋을 거라는 사실을. 2, 3구가 연속 체인지업이 되면서 투수가 다음 공을 패스트볼을 던질 듯해 준비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2경기 만에 첫 홈런을 터트렸지만 정작 이정후는 1루에서 2루 베이스를 밟을 때까지만 해도 홈런인 줄 모르고 전력 질주했다. 순간 ‘3루까지 뛰어야 하나?’ 하고 고민할 때 관중석에서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심판의 콜을 보고 홈런인 줄 알게 됐다고. 풀스윙으로 돌렸고 방망이 중심에 정확히 맞았기 때문에 외야로 쭉 뻗어나갈 수 있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키움 시절의 이정후는 시범경기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도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신인 때 말고 시범경기에서 잘한 적이 없었다. 현재 (MLB에서) 루키로 시작하는 거라 시범경기 때 잘할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이정후는 키움 시절 중장거리 타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2020시즌을 기점으로 2루타를 많이 치려고 연습할 때부터 항상 풀스윙으로 돌렸다. 그러다 2022년에 타격감이 최고조로 올라왔다. 지난해에도 타구 속도가 나쁘진 않았는데 발사각도나 이런 게 시즌 초반 좋지 않아 장타가 많지 않았다. 요즘에는 연습할 때 힘이 생겼다는 걸 느낀다. 지난해 발목 수술하고 운동장보다 웨이트트레이닝장에 더 많이 머물렀다. 미국 와서 구단에서 식사도 잘 챙겨주고 이런저런 영양제 등도 갖다줘서 잘 먹는 편이다. 이후 라인드라이브를 치려고 한 게 잘 맞으면서 장타로 연결된다. 처음부터 장타를 생각했던 건 아니다.”
이정후는 이날 처음으로 선수단 버스를 타고 원정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타던 선수단 버스와는 내부 구조나 형태에 질적 차이가 컸다고 말한다.
“한국 버스였으면 정말 편한데…(선수들에게 한국 버스를)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선수들이 (한국에선) 원정 경기 다닐 때 뭐 타고 이동하냐고 물어서 버스타고 간다고 했더니 크게 놀라더라. 그래서 선수들에게 한국에서 선수들이 타고 다니던 버스 사진을 보여줬니 금세 수긍했다. 이 정도의 버스라면 타고 다닐만 하겠다면서 말이다.”
이정후 시범경기 동안 원정 경기를 위해 이동할 때 계속 선수단 버스를 이용하겠다고 말한다. 이유는 자신이 루키란 사실 때문이다.
“밥 멜빈 감독님이 먼저 물어보셨는데 내가 버스로 이동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감독님은 경기 중간에 빠지게 되면 (기다리지 말고) 가족이나 친구 차를 이용해 퇴근해도 된다고 배려해주셨다.
밥 멜빈 감독은 경기 후 현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정후의 맹활약에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패스트볼, 변화구 등 모든 공에 잘 대응한 이정후를 지켜보며 선수에 대한 신뢰가 한층 두터워진 듯해 보인다.
미국 애리조나=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