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구·근생·신탁 사기 피해자들 대표적 소외 대상…경·공매 유예·정지 신청 등 특별법 주요 지원책 적용 안돼
현재 전세사기 피해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구제 신청 자체를 포기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고충센터가 지난해 6월 특별법 시행 이후 실시한 피해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425명)의 78.1%가 ‘특별법이 인정하는 피해자 요건’에 들지 못한다고 답했다.
혹시나 도움을 받을까 싶어 정부에 지원신청을 낸 피해자 중에도 10명 중 1명이 지원 대상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 ‘전세사기피해자지원위원회’가 지난해 6월 1일부터 지난 2월 21일까지 처리한 피해 지원 신청 총 1만 6004건 중 9.4%인 1497건이 ‘요건 미충족’으로 ‘부결’ 처리됐다.
피해자들의 호소로 부각된 ‘구제 사각지대’는 △전·월세 보증금이 ‘소액 임차’ 기준을 넘어서는 경우 △다가구·근린생활시설에 임차 거주한 경우 △신탁회사가 껴 있는 주택에 임차 거주한 경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거주해 온 주택에 대한 ‘경·공매 유예·정지 신청’이나 ‘경·공매 우선매수권 부여’, 주거지 이전 비용 마련을 위한 ‘최우선 변제금(소액임차인에 대해 보증금의 일부를 최우선으로 변제해주는 금액) 10년 무이자 대출’ 등 기존 특별법의 주요 지원책을 대부분 이용할 수 없다.
피해자들은 우선, 현실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소액 보증금’ 기준을 지적한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현재 소액 임차인에 해당하는 보증금 조건은 △서울 1억 6500만 원 이하 △과밀억제권역 1억 4500만 원 이하 △광역시 및 안산·이천·파주·평택 8500만 원 이하 △기타 7500만 원 이하로 규정돼 있다. 인천의 한 오피스텔 임차인인 40대 조 아무개 씨는 “보증금이 1억 6000만 원으로 최우선 변제금 회수가 어렵고, (건물 근저당에 비해) 후순위 임차인이어서 우선매수권을 쓰려 해도 기존 보증금 1억 6000만 원을 전액 손실한 채 추가 대출을 받아야 해 효율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주택이 경·공매 처리됐을 때 보증금의 30%에 불과한 최우선 변제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려면 그 자격 요건이 되는 ‘소액 임차 보증금’ 기준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피해대책위) 안상미 공동위원장은 ‘일요신문i’에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 가운데 최우선 변제금을 받을 수 없는 세대가 인천에서만 30%, 전국적으로는 70% 수준으로 파악된다”며 “소액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 취지에 맞게 소액 보증금 요건 완화가 적극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주택 유형 측면에선 ‘다가구주택’과 ‘근린생활시설’이 대표적인 구제 소외 대상으로 꼽힌다. 피해대책위가 지난해 8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다가구·근린생활시설 거주자가 전체의 ‘4분의 1’에 가까운 23.2%를 차지했다.
현행법상 최대 19가구 거주가 허용되는 다가구주택은 모든 가구를 묶어 ‘1세대’로 규정되기 때문에 거주자들이 임대인과 관계에서 온전한 임차인 권리 행사가 제한돼 ‘우선매수권’ 행사도 어렵다. 경·공매 유예 정지나 공공 매입을 신청할 경우에는 전체 임차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제한 규정이 가로막는다. 이때 임차인들의 요구나 입장이 엇갈려 갈등만 빚기 일쑤다.
외형상 일반 다가구주택이나 도시형생활주택으로 보이기 쉬운 ‘근린생활시설’의 경우 공부상 ‘사무소’인 건물을 주거용으로 바꿔 쓴 경우로, ‘위반건축물’로 취급돼 현행 특별법 적용이 어렵다. 하지만 거주인이 임대차 계약을 맺을 당시 이 같은 사실을 건물주나 공인중개사로부터 충분히 안내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서울의 한 근린생활시설 임차인인 30대 여성 이 아무개 씨는 피해대책위에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전세대출 승인은 (정부가)다 해줘놓고 막상 문제가 생기니 근린생활시설은 주택이 아니라며 선을 긋고 피해자 파악과 지원을 놓아버린 정부가 참 실망스럽다”고 토로했다.
부동산 법전문가들 시선에선 가장 ‘답이 안 나오는’ 유형으로 신탁회사가 껴 있는 피해사례가 꼽힌다. 신탁주택 임차인들은 보증금 구제는커녕 ‘임차행위’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될 정도로 최악의 여건에 있다. 임차인으로서 대항력 효력이 인정되지 않아 거주지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려 있다. 이들은 건물 소유권을 넘겨받은 수탁자(신탁회사)가 따로 존재하는지 모른 채 위탁자(건물주)에게 보증금을 건넸다가 ‘불법 임차인’이 된 경우로 △보증금 최우선변제 대상 △우선매수권 부여 △경·공매 절차 지원 등 주요 지원책에서 모두 제외된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임대인이 신탁사 동의 없이 계약을 하는 방식이다 보니 지금 특별법상에서는 임차인들이 피해자로 인정받기도 어렵고, 피해자로 인정받더라도 쓸 수 있는 대책이 없다”며 “주택에 대해 우선매수권 행사는 당연히 할 수 없는 것이고, 신탁사 소유로 돼 있어 공공이 이것을 매입해 공공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식의 대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선구제 후구상’을 핵심으로 내건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최종 통과할 경우 다가구 세입자들도 ‘최우선 변제금’ 상당의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열릴 전망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유효한 대항력이 있는 임차인에 한해 적용되는 조치여서 대항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탁주택 임차인들은 이마저 수혜가 어렵다. 개정안은 일단 신탁사의 인도 소송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담아 제한적으로 기능할 전망이다. 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 ‘세입자114’ 운영위원장인 김태근 변호사는 “이번 특별법 개정안에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처럼 신탁사기 주택도 인도소송 정지나 강제집행 일시정지가 가능도록 하는 방안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밝혀둔 대책은 피해자들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친다. 국토부는 지난해 12월 밝힌 ‘특별법 사각지대 보완방안’에서 통매입이 불가피한 다가구의 경우 큰 장벽이 됐던 ‘임차인 전원 동의’ 요건을 완화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직접 건물을 매입하기 어려울 경우 건물을 낙찰받은 새 소유주와 LH가 전세계약을 체결해 피해자들에게 재임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예고했다. 기존 주택 매입이 곤란한 근린생활시설과 신탁사기 피해자에 대해서는 전세 임대나 대체 공공임대주택을 지원하겠다는 계획 정도만 밝힌 상태다.
이강훈 기자 yg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