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즉각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최고 통치권자의 건강 문제는 그 자체가 중대사안이기도 하지만 대선정국의 한 복판이라는 시점으로 인해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 유고시 국정공백 문제에 대한 우려는 물론이고 ‘조기 대선 실시’ 가능성까지 일각에서 제기되는 등 별의별 풍문이 다 나돌았다. 일부 언론사는 대통령 유고시에 대비한 특집기사를 준비하는 작업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김 대통령의 와병’이 ‘정몽준 대통령 만들기’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여권 핵심부가 김 대통령의 와병을 핑계로 삼아 조기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 최근 지지율이 급상승중인 정몽준 의원이 여론의 검증을 받아 거품이 빠지기 전에 대권을 거머쥘 수 있도록 만들려한다는 게 그 골자였다.
다행히 김 대통령이 19일 을지국무회의 참석을 계기로 공식 일정을 재개함으로써 갈수록 기승을 부리던 온갖 풍문과 억측은 일단 수그러들었지만, 한때 대선정국은 이상기류에 휩쓸릴 뻔했었다.
김 대통령이 건강에 이상 징후를 보인 것은 지난 9일쯤이었다. 목감기에 걸려 고생을 하던 차에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지고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10일로 예정됐던 통일고문 오찬간담회가 연기됐었다. 김 대통령은 집권 이후 하루 평균 서너 개의 공식일정을 소화하는 등 ‘과로’해왔던 탓에 간혹 목소리가 쉬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했다.주말인 10, 11일 이틀간 업무를 중단하고 관저에서 휴식을 취했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12일에는 목감기 악화에 따른 폐렴 증세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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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4월14일 치료받고 퇴원하는 김대중 대통령 | ||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대통령의 목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아 비서실과 의무실에서 8·15광복절 행사전까지는 쉬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면서 “다만 13일 국무회의는 대통령이 직접 주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월요일인 12일 하루를 더 쉬고 업무를 재개한다는 설명이었다. 청와대가 김 대통령이 폐렴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 대통령의 건강이상설이 세간에 나돌 경우 온갖 유언비어가 퍼질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면 오히려 불필요한 사회불안은 예방할 수 있다는 게 청와대측 판단이었다.
하지만 여론은 다르게 흘렀다. 고령인 김 대통령이 폐렴에 걸렸다면 합병증이 수반될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 여의도 정가에서 흘러나왔다. 통상 폐렴으로 인한 사망률은 극히 낮지만 65세 이상 노인의 경우 면역력이 떨어져 합병증 등으로 인해 그 수치가 높아진다는 식의 얘기였다.
당시 청와대측은 김 대통령은 감기 뒤에 2차 감염으로 기관지와 허파꽈리가 인접한 부위에 ‘기관지 폐렴’이 생겼다고 밝혔다. 더욱이 김 대통령은 올해 들어서만 두 번째 입원치료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지난 3월31일 좌측 대퇴부 염좌 증상으로 고생하다가 4월9일 밤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입원, 6일 동안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었다. 때문에 “혹시 김 대통령이 다른 질환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적지않게 퍼졌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청와대측은 14일 김 대통령이 충분한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하고 기념사를 장대환 총리서리가 대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광복절 행사까지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자 온갖 주장이 쏟아져나왔다.
상당수 언론과 사회지도층 등은 대통령 유고시 ‘권한대행’ 체제가 미비하다는 점을 지적,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우리 헌법은 71조에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무총리에 의한 권한대행 승계를 규정하고 있지만 현재 장대환 총리 서리가 국회 인준을 받기 전이라 ‘공백사태’가 우려된다는 지적이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결장 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입원하면서 부통령에게 일시적으로 권한을 이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시적 권한 이행’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한나라당은 외견상 김 대통령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14일 오후 김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속한 쾌유를 빈다는 뜻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후보비서실 부실장인 정병국 의원을 보내 김 대통령에게 쾌유를 비는 의미에서 난을 전달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면 실제 한나라당 내부 분위기는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구심과 우려, 긴장감으로 팽팽했다고 보는 게 맞다.
“청와대 사람들은 혹시 김 대통령에게 감기라도 옮기지 않을까 싶어 매달 예방주사를 맞는다고 한다. 비서실장이 가급적 전화로 대통령과 통화한다는 이야기가 이걸 뒷받침해준다. 대통령이 면역력이 굉장히 떨어진 것 같다. 그게 당뇨 때문인지는 몰라도 격리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가길 바란다. 비상사태 생기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는다.
‘유고’ 얘기를 하면 욕 먹을까봐 대책을 세우라는 말도 못한다.” 당시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이렇게 김 대통령의 건강문제를 심각하게 진단했다. 또 상당수 당직자들은 “현행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유고되거나 스스로 건강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물러날 경우 보궐선거를 하지 않는 대신에 60일 이내에 차기 대선을 치르게 돼 있다”며 “그렇게 되면 대선구도가 급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이 돌연 중병을 이유로 사퇴하면 정몽준 의원이 사전검증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켜서 대선에서 당선되는 시나리오가 진행중이라는 의구심을 피력한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김 대통령이 유고를 선언할 경우 선거관련 규정과 국회의 승인문제 등에 대한 관련 법규를 조사하는 등 구체적 대비책까지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의구심에 대해 민주당측은 ‘황당무계한 생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청와대 내부는 상대적으로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측은 “김 대통령은 비서실에서 올린 광복절 경축사를 꼼꼼하게 손질할 정도로 건재하다”고 해명하면서 항간의 우려를 단호하게 일축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대통령이 지난 15일쯤부터 열이 많이 내려서 사실상 병이 나았지만 비서실과 의료진이 휴식을 건의한 것”이라며 “대통령은 밀린 업무를 소화하려고 일정을 잡으라고 하지만 밑에서 만류해왔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허갑범 주치의가 매일 관저에 들러 김 대통령의 건강을 점검하고 있고, 장석일 의무실장과 군의관 및 간호사들이 관저에 상주하고 있는 등 대비책도 철저하다고 설명했다.
김병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