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재등판엔 비토 기류…‘험지 생환’ 나경원·안철수 ‘텃밭 6선’ 주호영·조경태 ‘용산 선호’ 원희룡 주목
새로운 비대위 체제 시나리오도 거론되지만 국민의힘은 곧 있을 당선인대회에서 전당대회 개최를 결정, 지도부 공백을 최소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 후보와의 혈투 끝에 당선증을 거머쥔 나경원 당선인 등이 ‘중진 역할론’을 들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용산의 스탠스, 한동훈 위원장 거취가 최대 관전 포인트다.
#수도권, 영남 중진들 누구 거론되나
초상집 분위기의 국민의힘 내부에선 중진 등판론이 대세다. 경험 없는 인물들에게 더 이상 당 운영을 맡길 수 없다는, ‘초보 불가론’이 여당을 강하게 휘감고 있다. 한동훈 전 위원장이 이번 선거를 홀로 이끌다시피 하다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4년 전 21대 총선에서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당대표 자리를 쥐고 있다가 크게 진 기억도 소환된다. 수도권에서 낙선한 국민의힘 후보의 말이다.
“정치는 경험이 중요한 종합예술인데 한 전 위원장은 나쁜 사람 때려잡는 게 선거라는 식으로 야권을 범죄자로 치환하면서 이번 총선을 수사검사처럼 지휘했다. 정권심판론이 100% 가동된 이번 선거는 눈물 흘리며 엎드리고 비는 게 최상책이었는데 현실정치판을 경험하지 못한 한 전 위원장은 상황을 읽는 능력이 부족했고 결국 잘못된 선거 전략을 내밀면서 예정된 패배를 맞이했다.”
전당대회 출마 후보로 거론되는 중진들 중에는 일단 험지에서 살아온 다선들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올라있다는 평가다. 우선 수도권에서 승리한 당선인들이다. 21대 총선에 이어 22대에서도 국민의힘에게 수도권 벽은 너무나 높았다. 호남에 비견될 정도로 수도권은 이제 험지 중의 험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국민의힘은 수도권 122석 중 불과 19곳에서 승리했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의석수가 60곳으로 가장 많은 경기에서 민주당은 53석을, 국민힘은 6석에 그쳤다. 인천에서는 13개 지역구 중 2석만 국민의힘이 건져냈다.
수도권 중진론이 힘을 받는다면 5선의 권영세(서울 용산) 윤상현(인천 동‧미추홀을) 의원과 나경원(서울 동작을) 당선인, 그리고 ‘영원한 잠룡’ 안철수(경기 성남분당갑·4선) 의원이 1순위 후보들이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야당 의원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생환에 성공해 전당대회에서 유리한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됐다.
이 중에서도 인지도가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나경원 당선인과 안철수 의원이 일단 한 발 앞서있다는 평이다. 책임당원은 물론, 일반 여론조사에서도 지명도를 바탕으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할 저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가에서는 나 당선인, 안 의원의 전당대회 도전에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다.
둘은 모두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지역구에서 의석을 확보했다는 점, 그리고 이번 총선이 사실상 한 전 위원장 ‘원톱’ 체제로 진행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패배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수도권 중진이 상대적으로 유리해보이지만 여당 텃밭인 영남권 중진 의원들도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당내 최다선인 6선의 주호영(대구 수성갑) 조경태(부산 사하을) 의원이 후보군이다.
특히 주 의원은 여당 최대 지지기반이자 책임당원 숫자가 많은 대구·경북(TK)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치에 올라있다. 주 의원은 여당이 다수당이 됐을 경우, 국회의장을 노렸겠지만 이번 총선에서 이 기대가 불발되면서 당대표로 유턴할 전망이다.
리틀 노무현이라 불리는 야당의 거물 김두관 의원을 꺾은 김태호(경남 양산을) 의원도 다크호스로 오르내린다. 김 의원은 여야가 혈투를 벌인 ‘낙동강 벨트’ 최대 격전지에서 국민의힘에 승리를 안겨줬다. 김 의원은 본인의 지역구인 경남 거창·함양·산청·합천을 떠나 양산을로 출전 지역을 옮겼다. 희생과 헌신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당대표 선거에 나설 명분도 확실히 챙겨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대안부재론 통할까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결국 사퇴했다. 개표가 모두 끝난 4월 11일 오전 총선 참패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를 밝혔다.
2023년 12월 정치를 시작한 이후 이번 총선 기간을 비롯해서 늘 자신만만했던 한 전 위원장은 사퇴 회견에서 의기소침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11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의 3분짜리 짧은 기자회견을 통해 “민심은 언제나 옳다. 국민의 선택을 받기에 부족했던 우리 당을 대표해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한 전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장에 검은색 정장과 넥타이 차림으로 나타났고 시종 엄숙한 표정이었다.
한 전 위원장은 그러나 정계를 떠나겠다는 말은 내놓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국민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지 고민하겠다.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만 국민만 바라보면 그 길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잠시 쉬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비대위원장직 사퇴 발표 기자회견에서 ‘정치를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제가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 전 위원장은 답했다. 그는 총선 유세 때 여러 차례 해외 유학설 등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공적으로 봉사할 일만 남았다며 총선 이후에도 정치권을 포함한 공적 영역에서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한 전 위원장이 정치판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에 도전할 걸로 관측하는 배경이다. 무엇보다 당내에서 한 위원장만큼 강력한 팬덤층을 갖고 있는 인물이 없다. 나경원 당선인과 안철수 대표가 인지도 높은 당내 인사로 꼽히지만 한 전 위원장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선거 패장이 물러나지 않고 당권을 다시 거머쥔 사례가 있기는 하다. 홍준표 대구시장이다. 홍 시장은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패한 직후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당내부에서 “홍준표 말고 누가 있나”라면서 대안부재론이 쏟아졌다. 홍 시장 역시 전당대회 출마 의지를 다졌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떠난 지 한 달도 안 된 2017년 6월 4일 귀국했다. 당 대표 출마를 공식화한 그는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다.
홍 시장 사례와 단순 비교가 어렵다는 말도 나오긴 한다. 홍 시장은 그 당시 당 내부에서 “당대표를 맡길 만한 정치 경험이 많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재등판했다. 하지만 한 전 위원장은 새 대표로 등판하기에는 이번 총선에서도 드러났듯이 정치력이 부족하다는 당내 목소리도 크다.
TK 보수 맹주를 자처하는 홍 시장은 기다렸다는 듯 한 전 위원장 재등판 불가론을 외치고 나섰다. 그는 4월 11일 대구시청 기자실에서 “정권의 운명을 가름하는 선거인데 초짜 당 대표에 선거를 총괄하는 사람이 또 보선으로 들어온 장동혁(사무총장)이었고, 거기에 공관위원장이란 사람은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서 한 전 위원장 체제를 직격했다.
홍 시장은 “처음 시작할 때 제2의 윤석열 기적을 노리고 한동훈을 데려온 것이었는데 국민이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면서 “(전략도 없이) 참 답답한 총선을 보면서 저러다 황교안(전 미래통합당 대표) 꼴 난다고 봤다”고 쏘아붙였다. 이어 “깜도 안 되는 것을 데리고 와서는…”이라고 맹폭했다.
홍 시장은 “당내에도 인물이 차고 넘치는데 어떻게 철딱서니 없는 저런 애를 데려다 선거 전반을 맡기느냐”고 거듭 말한 뒤 “일각에서 대선 경쟁자로 본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한 전 위원장이 선거에) 나오는 순간 경쟁자가 아니라 1회용이고, 황교안처럼 사라질 것으로 봤다”고 했다.
#‘키맨’ 용산의 기류는?
'여소거야' 시대가 열리면서 용산의 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하지만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실 힘을 무시할 순 없다. 더욱이 대통령 임기가 3년이나 남은 시점이라 용산의 정무적 입장은 여권 전체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얼굴을 붉힌 용산과 한 전 위원장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본다. 한 전 위원장은 자력으로 전당대회에 나올 수 있을 뿐, 용산의 지원사격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한 전 위원장이 출마를 한다면 용산의 거센 태클이 들어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용산 쪽에서는 윤석열 정부 1기 내각 출신인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을 선호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원 전 장관이 비록 총선에서 패하긴 했지만, 국민의힘 험지인 곳에서 그것도 이재명 대표를 상대로 선전했다는 점이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대통령실과의 ‘원팀’ 부분에서도 원 전 장관은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는 향후 전대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여당이 불협화음을 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으로도 이어진다. 그립감을 놓지 않으려는 대통령실과 수평적 관계 그 이상의 것을 원할 것으로 보이는 여당 간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팬덤이 강했던 박근혜 대통령조차 이명박 정부 초·중반에는 목소리를 전혀 안 낼 만큼 보이지 않는 대통령실의 힘은 강하다”며 “다가오는 여당의 전당대회에서도 용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무시하지 못할 것인데 강력한 후보는 존재하지 않고 한 전 위원장은 우군이 갈수록 줄어드는 실정이어서 절대 강자 없는 대혼전이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